"홍신선(동국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꽤 많은 논자들이 합의했듯이, 서정주의 시적 성취에 있어 가장 뛰어난 대목은 불교적 세계인식과 상상력을 기반으로 한 시집 <신라초>(1960)와 <동천>(1968)무렵의 작품들이다. 1936년 시단 데뷔 무렵부터의 '생명현실을 격정의 육성으로 노래하던 시 세계'에서 자연과 인간이 서로 조화로운 세계를 구성한다는 중기 시 세계를 거쳐 도달한 이 시 세계는 아마도 가장 압축되고 울림 높은 서정주만의 세계일 것이다. 그래서 서정주를 가장 서정주답게 만든 시 세계라면, 이 불교적 세계인식을 기반으로 한 1960년대 무렵의 것들을 손꼽아야 할 터이다.
그러면 이 시기 서정주 시에 나타나고 있는 불교적 세계인식은 어떤 것인가. 이 시기 서정주에게 있어 세계는 일체 생명있는 것이나 사물들이 모두 통·공시적 차원에 있어 서로 유기적 관계를 맺고 있는 전체상의 것이었다. 그 유기적 관계란 삼라만상 모든 것이 통시적으로나 공시적으로 서로 인연과 윤회전생을 통하여 얽혀 있는 관계인 것이다. 또한 그 얽혀 있는 양상도 상하 수직의 관계가 아닌 나와 너같은 피차의 수평관계를 띤 것이었다. 이는 사물들이나 낱생명들을 개별자들의 단절관계로 또는 이성중심주의식의 수직관계로 파악하고 인식하는 태도와는 너무나 다른 것이기도 하다.
이 진술을 다르게 말하자면, 대기와 햇볕 그리고 동식물에 인간이 하나로 어울린다는 세계이해이며 조금 과장하자면 일제 모든 사물이 우주적 인연으로 맺어져 있다는 상상인 것이다. 뿐만이 아니다. 시인 서정주는 여기서 삶을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이란 단순히 지금 이곳의 현세만을 사는 것이 아니라 전생과 내생이란 시공을 함께 사는 사멸이 없는 존재들이라고 인식한다. 사멸이 없이 산다는 것은 우리가 생물학적 차원의 육체적인 삶만을 자신의 유일한 삶으로 여기지 않고 사후나 내세에서 영혼이 누리는 목숨까지를 삶으로 이해하는 것을 뜻한다. 결국 이와 같은 삶에 대한 인식은 죽음 뒤의 사후세계마저 형식을 달리한 삶의 일환으로 이해하도록 만들고 있다. 서정주가 시집 <신라초>와 <동천>의 여러 작품들을 통하여 주장한 신라정신은 바로 이와 같은 자아와 세계에 대한 인식을 중핵으로 한 것이었다.
그러면 서정주는 이와 같은 세계인식을 어떻게 형상화하고 있는가. 그 형상화의 원리란 어떤 것인가. 일찍이, 서정주는 자신의 이미지 생산원리를 초현실주의와 흡사한 것으로 설명한 적이 있었다. 곧, 초현실주의의 절연(絶緣)의 원리와 비슷하게 불교의 연기나 윤회전생의 사고를 바탕에 깔고 이미지와 이미지의 돌연한 연결을 한다는 설명이 그것이다. 그는 이와 같은 돌연한 이미지 연결을 은유의 풍토라고까지 주장한 바 있다.
결국, 이와 같은 서정주 나름의 독특한 불교적 상상력과 세계인식은 그의 시적 도정에 있어서도 특이한 미학을 성취한 것이지만 더 나아가 우리 현대시사에 있어서도 전무후무한 일로 평가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와 같은 서정주의 시학이 다시 '질마재의 신화'로 대표되는 후기 신화적 상상력으로 이어지는 것을 보게 된다. 5번째 시집 <동천>이후 활발하고 줄기차게 쏟아져 나온 열 권의 시집들은 바로 이 같은 상상력과 세계인식을 빼놓고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아무튼, 구한말의 큰스님 박한영을 만나 불교에 뜻을 두게 된 이래 서정주는 그의 생애 내내 불교적 상상력을 통한 독특한 시학을 성취하였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서정주는 이제 빌어 입었던 현세 육신의 의복을 벗고 작품 '내 영원은'에서 말한 그대로 '물빛 라일락의 빛과 향의 길'을 가게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 현대시에게 그가 쥐어 주고 간 찬연한 꽃다발을 받을 아이는 지금 또 어디쯤 오고 있는 것일까. 선생님, 부디 극락왕생하소서.
■미당 서정주의 삶
'국화 옆에서'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한국 시단의 거목 미당 서정주 시인이 작년 12월 24일 타개했다. 폐렴 악화로 24일 새벽부터 혼수상태에 빠진 미당은 고령으로 인한 노환까지 겹쳐 끝내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28일 고향 선영에 묻혔다. 향년 85세.
미당은 1915년 5월 18일(음력) 전북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 질마재 마을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서당과 초등학교를 마친 뒤 서울 중앙고보에 들어갔으나 광주학생운동 소식을 듣고 시위를 주도하다 퇴학당했다. 이후 빈민촌에 들어가 넝마주이 노릇을 하는 등 떠돌다가 석천 박한영 스님을 만나면서 지금의 안암동 개운사 뒤편 대원암에서 <능엄경> 등 불교경전을 배웠다. 스님은 자신이 교장으로 있던 중앙불교전문학교(현 동국대)에 입학시켰고, 불교적 세계관에 바탕한 윤회설에의 경도, 절대 영원에로의 회귀 욕망 등으로 말해지는 미당 시의 전반적인 기조는 바로 여기서 싹을 틔우게 된다.
미당은 1935년 '시건설'이란 잡지에 '스물세햇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로 널리 알려진 시 '자화상'을 발표함으로써 시인으로서의 첫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시적 여정의 본격적인 시작은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벽'이 당선되면서부터다. 그 해말 김달진, 김동리, 오장환 등과 함께 동인지 '시인부락'을 펴내면서 본격적인 시작활동을 했다.
평생 1천여 편의 시를 남긴 미당의 시세계를 한마디에 가두기에는, 미당이 보여준 상상세계의 오지랖은 크고도 넓다. 미당의 시는 억눌린 정신의 아픔을 노래하는 관능적인 초기시서부터 신화 정신과 불교적 달관에 이르는 후기시까지 다양한 편력을 보여준다. 신라와 불교의 윤회전생, 그리고 민가에 떠도는 온갖 민화와 설화들을 에두르는 그의 시적 방황, 혹은 정신사적 편력은 한국인의 정서에 떠올라 있는 생사관, 이승과 저승을 한데 어우른다.
30대까지만 해도 매력에 지나지 않았던 불교는 40대를 지나면서 미당의 작품 깊숙히 천착하며 문학적 절정기를 맞는다. <신라초>에서 시작된 생명에의 근원적인 탐구 노력은 신라의 불교적 세계 천착으로 이어지며 특히 불교적 윤회에 모든 것을 위치 지으려는 의지를 뚜렷이 보여준다. 시집 <동천>에 이르면 이러한 불교적 윤회사상이 신라 천착에서 벗어나 좀 더 보편적인 신앙의 체계를 이뤄, 구도자로서의 일정한 자세를 정립하기에 이른다. 마지막 절정기 작품 <질마재 신화>는 여기에 머무는 대신 한 걸음 더 나아가 한국인의 의식 저변에 깔려 있는 신화적 원형을 살핀다.
미당은 흔히 '시의 정부'로 불린다. 시에 관한 한 거의 모든 시인이 미당의 영향권에 들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미당에게도 늘 따라 다니는 '덫'이 있다. 일제말 친일잡지인 '국민문학' 편집일을 보면서 친일시나 종군기를 썼던 일은 설사 당시로서는 대세였다 할지라도 씻을 수 없는 흠집을 남겼다. 또 80년대 군부정권에 대한 찬양 발언 등은 그를 아끼는 수많은 사람들을 실망시켰다.
■미당 서정주 시인 연보
△1915년 전북 고창 출생
△1929년 중앙고보 입학
△1935년 동국대 전신인 중앙불교전문학교 입학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김동리, 오장환, 이용희 등과 '시인부락' 동인 결성
△1941년 첫 시집 <화사집> 출간
△1954년 예술원 창립과 함께 예술원 회원, 서라벌 예대 교수
△1960년 동국대 교수
△1971년 현대시인협회 이사장
△1972년 불교문학가협회 회장, <서정주 문학전집>(전 5권) 출간
△1975년 시집 <질마재 신화> 출간
△1977년 한국문인협회 회장
△1982년 시집 <학이 울고 간 날들의 시> 출간
△1991년 <미당 서정주 시전집>전 (2권) 출간
△1997년 마지막 시집 <80 소년 떠돌이의 시> 출간
△2000년 12월 24일 폐렴과 노환으로 별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