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세계관을 예술적 형식으로 담아내는 작업은 이제 한국문화의 큰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문학의 경우 멀게는 만해 스님에서부터 서정주, 가까이는 황지우에 이르기까지 근현대사를 관통하며 양적·질적 부피와 성과를 축적해 왔다. 한 예로 카톨릭 신자인 소설가 최인호가 경허 스님의 삶을 <길 없는 길>이란 소설에 담은 걸 보면 종교적 범주마저 뛰어넘은 듯하다.
이런 흐름은 최근의 공연 예술 분야에서도 커다란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바리데기 설화를 바탕으로 한 총체극 '우루왕', 세계최고 금속활자본 <직지심체요절>의 제작과정을 오페라로 표현한 '직지' 등이 대형무대에 올랐고, 만해 한용운 스님의 작품을 바탕으로 한 '무애'는 올해 서울무용제(22회)에서 대상을 안았다.
미술 분야 역시 이러한 흐름에 왼 고개를 젓지 않고 있다. 한국 현대미술의 주류에서 선(禪를)적 분위기 또는 상생과 원융의 가치 추구는 특별한 일이 아니다.
왜 다시 '선'일까.
토속적인 소재로 한국적 화풍을 펼쳐온 이만익(62)씨와 80년대 민중미술을 대표하는 목판화가에서 90년대 이후 선적인 분위기가 짙게 풍기는 작품세계를 보여주는 이철수(46)씨. 단순·명쾌한 굵은 선과 색채로 대중적 공감을 얻고 있는 두 화가의 전시를 보며 이런 물음에 대한 답을 구할 수도 있겠다.
한국적 정서의 원형을 전설과 설화, 서민들의 삶에서 찾아온 서양화가 이만익씨의 '한국정서의 원류를 찾아서'전은 12월 17일까지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린다.
95년 '이만익 그림 40년 회고전' 이후 5년 만에 열리는 이번 전시회를 위해 이씨는 1천 호 짜리 '탈놀이', 500호 짜리 '석굴암 본존도' '새날' '무릉부감도' 등 300호가 넘는 대작 8점을 포함해 40여 점을 준비했다.
이번에 선보인 작품들은 예전의 틀을 이어 가면서도 주제의 폭과 표현방법에서 변화를 꾀했다. 특히 '탑' '산사' '미륵반가사유상' '백제관음도' 등 불교 소재의 작품을 대거 선보이고 있어 눈길을 끈다. 불상이나 사찰풍경 등 불교적 소재가 작가 특유의 화법으로 재해석되어 나온다.
'삼불'은 마애불 등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소재지만 우리의 전통 한복을 입은 가족사진 같은 분위기의 삼존불로 재창조해 낸다. '행려관음도'에서도 한복차림의 관음보살은 다정다감한 '누이'와 '아낙'으로 새롭게 다가온다. 이밖에 한국 탈춤의 해학적 특성을 강렬하게 표현한 '탈놀이'에서부터 '하백일가도' '유화취적도' '주몽' 등 고구려 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들, '일출' 등 자연풍경을 소재로 다룬 작품과 서민적이고 향토적인 작품인 '가족도' '도원취적도' 등을 선보인다. (02)720-1020
충청도 박달재 비탈에서 땅 갈고 목판 깎으며 살기를 14년째. 목판화가 이철수씨는 1백34점이나 되는 '수확물'을 들고 22일 전국 5곳에서 동시에 전시회를 열었다. '이렇게 좋은 날'을 주제로 한 이번 전시는 서울 인사동 학고재와 소격동 아트스페이스서울을 비롯해 부산 공간화랑, 대구 예술마당솔, 전주 전북학생종합회관, 청주 무심갤러리에서 12월 16일까지 계속된다.
이씨의 판화는 무엇보다 왁자지껄한 도시생활에선 맛보기 힘든 여백의 미를 담고 있다. 이번에 발표하는 신작들 역시 더 이상 보태고 빼기 어려울 정도로 단순화한 표현이 돋보인다. 게다가 그림 한 쪽에 자리잡은 짧은 잠언 투의 문구는 깊은 울림을 더해주기도 한다. 시서화가 한데 어우러지는 문인화의 전통을 판화에 도입한 이른바 '이철수식 판화'다.
선화적 색채를 띠면서도 이씨의 작품은 고답적이지 않다. 논밭에서 일할 때, 큰길이나 시장에서, 지는 해, 떨어지는 낙엽 등 생활 속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지만 놓치기 쉬운 것들 속에서 소박한 깨달음을 끌어낸다. (02)739-4937
선(禪)의 세계를 곁눈질이라도 해 본 사람이라면 전시회장을 나설 때쯤 '평상심이 곧 도(平常心是道)'라는 옛 선사의 말을 떠올리게 될지도 모르겠다. 두 화가의 붓질과 칼질은 결국 도나 깨달음은 먼 데 있는 게 아니라 하루하루의 살림살이에 있음을 확인하는 작업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