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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월사=고영배 기자
ybgo@buddhapia.com
다음은 하안거 결제법어 모음.
* 청산이 백운을 덮었느니라.
-조계종 종정ㆍ해인총림 방장 법전스님
결제가 되었습니다. 해제기간 동안 청산만이 지키고 있던 큰방은 결제가 되니 백운과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청산과 백운이 어우러지니 불법(佛法)의 적적대의(的的大意)가 그대로 드러납니다. 흔히들 청산은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주인의 의미로, 백운은 움직인다는 뜻으로 객을 비유할 때 사용합니다.
그리고 또 백운은 이(理)요 청산은 사(事)라고도 합니다. 이사가 잘 어우러져야 불법(佛法)의 적적대의(的的大意)가 그대로 드러나게 됨을 결제일에 더욱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선문(禪門)에서는 백운을 자유자재(自由自在)로 오고가면서 집착하지 않고 걸림이 없는 수행자에게 비유합니다.
하지만 겉모양만 머물러 있다고 모두가 청산이요, 자유롭게 걸림없이 나다닌다고 해서 백운인 것은 아닙니다. 몸은 머물러 있지만 마음에 집착이 없는 사람은 몸은 비록 청산이지만 마음은 백운인 것입니다.
몸은 걸릴 것없이 다니지만 마음이 어느 한 곳에 고착되어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몸은 백운 속에 머물러 있겠지만 마음은 청산을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어느 때건 백운이 될수도 있고 청산이 될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백운과 청산은 늘 함께 연기관계인 중도를 이루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백운이 없는 청산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또 설사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청산이 없는 백운은 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결제는 밖으로는 청산과 백운이 함께 어우러져 주객을 구별하지 않는 경계를 말함이요, 안으로는 내 마음 속의 청산과 백운 즉 주객을 나누지 않는 것입니다. 또 결제란 가르치는 선지식인 주(主)와 배우는 납자인 객(客)을 주객으로 나누지 않고 치열하게 서로 탁마하는 회상(會上)이기도 합니다.
오늘 하안거 결제일을 맞이하여 청산은 무엇이며 백운은 또 무엇인지 이 산승이 한마디 하고자 합니다.
청산과 백운을 가지고 법거량한 경우는 먼저 동산양개(洞山良价)선사가 있습니다.
스님께서는 남전보원(南泉普願)과 위산영우(潙山靈祐) 선사에게 참학하였고 운암담성(雲巖曇晟) 선사의 법을 이었습니다. 문하에 운거도응(雲居道應) 조산본적(曹山本寂) 소산광인(疎山匡仁) 등이 있습니다.
따라서 선종 오가의 일파인 조동종(曹洞宗)의 고조(高祖)가 되는 것입니다.
그 동산선사에게 어느 납자가 물었습니다.
“무엇이 청산과 백운의 아버지입니까?”
“빽빽히 우거지지 않는 자이다.”
“무엇이 백운과 청산의 아이입니까?”
“동서를 분별하지 않는 자이다.”
“백운이 종일 의지한다 함은 무엇입니가?”
“떠나지 못함이다.”
“청산이 아무것도 모른다 함은 무엇입니까?”
“둘러보지 않는 것이다.”
동산스님은 청산과 백운의 아버지는 빽빽이 우거지지 않은 자이며 어머니는 동서를 분별하지 않는 자라고 하여 청산과 백운을 한묶음으로 묶어 버립니다.
또 청산백운의 아버지와 청산백운의 아들이라는 댓구(對句)를 세웁니다. 그리고는 청산과 백운을 다시 댓구(對句)로 나누어 백운의 의지처는 청산을 떠나지 않는 것이고 청산은 늘 백운을 살펴보아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청산과 백운은 하나이면서 또 둘이며 그리하여 둘이면서 또 하나라는 의미라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임제의현(臨濟義玄)선사는 청산과 백운을 통하여 주객(主客)의 경계를 말씀하셨습니다. 흔히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청산을 주인으로 백운을 객으로 비유한 것이 그 내용입니다. 특히 선사께서는 주인만을 위하려다가는 불법이 가라앉는다고 말씀하시고는 다시 물었습니다.
“빈중주(賓中主) 즉 객 가운데 주인도 알지 못하면서 어떻게 주중주(主中主) 즉 주인 가운데 주인을 알아낼 수 있겠는가?”
그러자 어떤 납자가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주인 가운데 주인입니까?”
“그대 스스로 말해보라.”
“제가 말한다면 객 가운데 주인이 됩니다. 무엇이 주인 가운데 주인입니까?”
그러자 게송으로 대답하였습니다.
차견금시학도류(嗟見今時學道流)하니 천천만만인문두(千千萬萬認門頭)로다.
흡사입경조성주(恰似入京朝城主)이러니 지도동관즉편휴(祗到潼關卽便休)로다.
아! 요즈음 도를 배우는 부류들을 보면
누구나가 문 앞만을 알 뿐이로다.
서울에 들어가 성주께 조회하려 하면서
동관에 이르러 그만두는 것과 같구나.
또 임제선사는 선지식과 납자가 만날 때 4가지 양태를 주인과 객으로 나누어 설명했습니다.
먼저 객간주(客看主)입니다. 객으로 주인을 보는 것입니다. 선지식이 보통이고 납자가 뛰어난 경우를 말합니다.
둘째 주간객(主看客)입니다. 주인으로 객을 보는 것입니다. 선지식은 뛰어난데 납자들이 보통인 경우입니다.
셋째 객간객(客看客) 객으로 객을 보는 것입니다. 선지식과 납자 둘다 보통인 경우입니다.
넷째 주간주(主看主)입니다. 주인으로 주인을 보는 것입니다. 선지식과 납자가 함께 뛰어난 경우입니다.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결국 마지막에는 가르치는 선지식인 주(主)와 배우는 납자인 객(客)을 나누지 않고 치열하게 서로 탁마하는 것이 제대로 된 청산과 백운의 관계임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선지식과 납자가 모두 근기가 수승하다면 주인으로서 주인을 보는 주간주(主看主)가 됩니다. 주객이 분별되지 않고 주객이 하나가 되는 그래서 모두가 주인인 경지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용산(龍山)선사에게 동산(洞山)스님이 묻는 주객문답이 있습니다.
용산(龍山)선사에게 동산(洞山)스님이 물었습니다.
“어떤 것이 주중주(主中主) 주인 가운데 주인입니까?”
“장년불출호(長年不出戶)니라. 여러해 동안 문 밖에 나서지 않았느니라.”
“어떤 것이 주중빈(主中賓) 주인 가운데 손님입니까?“
“청산복백운(靑山覆白雲)이니라. 청산이 백운을 덮었느니라.”
“손님과 주인의 거리가 얼마입니까?”
“장강수상파(長江水上波)니라. 큰 강물위의 파도 이니라.”
“손님과 주인이 만날 때는 어떤 말을 합니까?”
“청풍불백월(淸風拂白月)이니라. 맑은 바람이 밝은 달을 스치느니라.”
이 말을 듣고서 천동정각(天童正覺)선사는 여기에 대하여 이렇게 염(拈)하였습니다.
주야운장정상(主也雲藏頂相)이요,
빈야설압미릉(賓也雪壓眉稜)이로다.
주인이란 구름이 정수리를 덮음이요 손님이란 백설이 눈섭을 덮는 것이로다.
상거야문사유한(相去也門司有限)이요
언설야옥진금성(言說也玉振金聲)이로다.
서로의 거리란 문지기의 권한에 한계가 있는 것이요, 손님과 주인의 이야기란 옥소리 금소리로구나.
그렇다면 이 산승이 시회결제대중에게 묻겠습니다.
천동 정각 선사의 이 네 글귀가 옛선지식의 말씀과 같은 것입니까? 다른 것입니까?
총림에서 결제를 하려 온 눈푸른 납자들은 이 한 철 동안 잘 가려보시길 바랍니다.
억(喝)!
2546(2002) 하안거 결제일
* "일과 공부가 둘아닌 산공부"
-조계총림 방장 보성스님
不過數日前에 四月八日을 지냈는데 오늘이 벌써 十五日이라니 歲月이 빠르기가 화살 같도다.
해마다 돌아오는 結制를 恒常 같은 날로 봐야 할 것인가 다른 날로 봐야 할 것인가 다르다고 하면 羊머리에 뿔 없는 것 같고, 같다고 하면 토끼머리에 뿔 있는 것과 같다
저 曹溪山 위 달그림자가 曹溪山 밑의 물에 비치는데 바람이 불어 물결이 흔들리니 달이 조각조각 부서진다 하리라
오늘 내가 大衆에게 因果이야기를 조금 하고자 합니다
壬亂때 泗溟스님이 王命을 받들고 講和使節이되어 日本을 건너 갈 때 東萊府使가 病을 핑계로 餞送하지 안 했고 講和策任을 完遂하고 돌아 올때도 東萊府使는 如前히 病을 핑계로 迎接하지 않자 斬首로 罰하였다 스님께서는 末年에 海印寺弘濟庵에서 療養할 때 醫師를 불러 治療를 받는데 針이 穴에 꼽히는 瞬間에 毒針임을 感知하고 내 許諾없이 針을 빼지 말라고 한 뒤 大衆을 불러놓고 나는 지금 毒針을 맞고 있으니 針을 뺌과 同時에 목숨이 끝날 것이다.
내가 東萊府使를 斬한 因果를 오늘 갚는 것이니 내가 죽은 뒤에 醫師를 罰하지 말라고 했다하니 이는 바로 因果에 기꺼이 順從한 것이다. 因果는 凡夫와 聖人이 똑같이 받지만 凡夫는 因果에 속아 살고 聖人은 因果에 속지 않는 것이 다를 뿐이다.
今日大衆은 因果에 속지 않을 自信이 있는가
打柱杖一下云
猿抱子歸靑嶂後하고 鳥啣花落碧巖前이로다
원숭이가 새끼를 안고 푸른 산 뒤로 가고
새가 꽃을 물고 푸른 바위 앞으로 내려오네
今日大衆은 一動一靜이 모두 因果임을 깊이 믿고 일하는 것과 工夫가 둘이 아닌 산 工夫를 하기 바랍니다. 생각이 바르면 잠깐동안에 須彌塔을 쌓고 생각이 바르지 못하면 平生 애써도 地獄門이 가까울 뿐이로다
一喝 下座
* "자기마음이 참부처"
-덕숭총림 방장 원담스님
歷 代 祖 師 是 何 佛
皆 是 虛 妄 妄 是 佛
生 佛 原 是 同 一 체
以 妄 念 自 縛 自 繩
역대 조사 어떤 것이 부처이냐
모두 허망하여 허황된 것이 부처이니라
衆生과 佛이 원래 한몸인데
망념으로써 스스로 얽어 묶네
어느 때인가, 楡岾寺의 五十三佛을 모신 법당에서 많은 大衆이 모인 중에 만공 조실스님께서 “부처님이 쉰세 분이나 되는데 어느 부처님이 主人佛인고?” 하고 물으셨다.
한 衲子가 팔을 들어 한복판의 부처님을 가리키자 조실스님께서 “손 없는 사람은 못 가리키겠다.”하시자, 衲子는 “손으로 가리킨 바는 없습니다.”
하니 조실스님께서 “그러면 무엇으로 가리켰단 말인고!”하시니 이에 衲子는 다시 팔을 들어 손가락으로 가리킴에 조실스님께서는 “남의 흉내 내지마라.”하셨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인 大衆들은 일러라. 어떤 것이 主人佛인고?
<柱杖一打>
이 마음은 本來 淸淨하여 가히 취할 수 있거니와 바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의 마음이 참 부처인 줄 알지 못하고 자기의 마음이 참 法인 줄 알지 못하여 만일 마음 밖에 부처가 있다거나 性品 밖에 법이 있다, 하면서 이 생각을 굳게 執着하여 佛道를 救하고자 한다면 비록 微塵劫을 지낸다 하여도 어려울 것이니라.
江 月 照 曜 松 風 吹
永 夜 淸 ? 何 所 爲
四 方 回 顧 無 覓 處
閉 目 緘 ? 卽 是 佛
강 위에 달 밝고 솔바람 맑으니
고요한 밤 맑은 하늘 아래 무엇을 할꼬
사방을 돌아 봐도 찾을 곳 없더니
눈 감고 함묵함이 부처라네.
* "여러만물이 낱낱이 부처"
-영축총림 방장 월하스님
柱杖一下
白的的靑寥寥 赤條條空索索
분명하고 쓸쓸하며 산뜻하고 텅 비었도다.
過去諸佛已當如是住
現在諸佛今當如是住
未來諸佛亦當如是住
山僧 擧唱已是寐語
四部衆因甚立地 睡
과거의 부처도 이렇게 살았고 현재의 부처도 이렇게 살고 있으며 미래의 부처도 이렇게 살 것이니, 산승이 부르는 이 노래도 이미 잠꼬댄데 사부대중은 무엇 때문에 이 자리에서 졸고 있는가?
一喝一棒當陽勢
諸方老幼好商量
靈鷲山路歌謠者
古往今來不變常
활을하고 한방망이에 바로 형세가 드러나니 제방의 노유가 서로 법거량하나 영축산길서 노래하는 자만이 예나 지금이나 바뀌지 않는구나.
선원대중(禪院大衆)이여!
금일결제(今日結制)라 하니
직하무심(直下無心)하여
묵계이기(默契而己)하라.
의심즉차(擬心卽差)니라.
약무일념(若無一念)이라도 변시경(便是境)이니 망심자멸(妄心自滅)하면 무복가추심(無復可追尋)이다. 처처개원(處處皆圓)이요, 만류지중(萬類之中)에 개개시불(箇箇是佛)이니라.
선원대중은 오늘 결제를 하니 당장 무심으로 묵연히 계합할 뿐이요, 마음으로 헤아리면. 곧 어긋난다. 만약에 한 생각도 없다 해도 그것도 경계이니 망령된 마음을 스스로 없게 한다면 더 이상 쫓아가 찾을 것이 없을 것이다. 곳곳마다 모두 원만하고 여러 만물이 낱낱이 부처이니라.
木鯨飮海水 露出海底山
나무 고래가 바닷물을 마시니 바다밑의 산이 드러나는구나.
柱杖三下
* 태고총림 중앙선원장 지허스님
(法床에 올라 良久後에)
白雲雲裏靑山重 靑山山中白雲多
日與雲山長作伴 安身無處不爲家
흰구름 깊은 속에 푸른 산이 첩첩하고
푸른산 깊은 속에 흰구름만 많다네
날마다 구름과 산이 내 친구된지 오래라
몸마저 편안하니 곳곳마다 내집일세.
이 頌은 우리 宗祖 太古和尙께서 깊은 산속에 修行하시면서 하늘에 떠서 정처없이 흐르는 흰구름을 보시고 무심코 혼자하신 말씀이십니다.
本來 처음 發心해서 話頭드는 날이 結制요 話頭를 打破하여 廓徹大悟 하는 날이 解制날 이겠으나 峻峰을 오르메 가파르기만 하면 오르는 사람이 至難하므로 도리어 懈怠를 일으켜 退轉할까 염려되어 간간이 平地를 두거나 얼마간 내리막 길을 두었다 오르는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다시 夏安居 結制日을 맞이하는 것은 마음을 다잡아 결정코 더 없는 正法을 얻어 廓徹大悟를 이루자는 공공의 약속입니다. 이 약속을 잘 이행하여 廓徹大悟에 이르지 않고서야 無漏한 安心立命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胎卵濕化로 生滅하는 一切衆生이 다 같이 자기가 지닌 肉身을 금싸라기 처럼 아끼고 귀하게 여겨서 조금이라도 편안함을 얻으려고 갖은 노력을 다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이 肉身이 있는 이상 많고 작고 간에 物質에 의지할 수 밖에 없으니 무엇이나 가능한 한 내 것을 만들고자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이세상의 富貴榮華가 이 肉身을 편안하게 하고 所有한 財産이 泰山 같은들 生老病死가 끊어지지 않으며, 憂悲苦惱가 滅하지 않는 이상 이 肉身이 결코 편안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人生이 百年을 산다한들 三萬六千日이 一場春夢이라 하기도 하고 一朝塵이라하기도 합니다.
이 肉身이 편안을 얻은 뒤라야 마음이 편안해지며 마음이 편안해야 육신도 편안합니다. 그래서 肉身과 마음이 둘이 아닌 편안함에 이르러야 十方世界가 다 내 집입니다.
엊그제 사월초파일 날 無憂樹 나무아래 왕자로 태어나신 싯다르타 태자도 이 세상의 富有萬德이 生老病死 앞에 한 티끌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 차리고 安心立命處를 얻기 위하여 王宮을 떠나 六年間의 難行苦行 한 끝에 見明星悟道하여 釋迦如來가 되셨습니다.
三世의 諸佛祖師가 다 이 悟道의 길을 보이시는 것은 一切衆生이 다 같이 귀하게 여기는 肉身이 있을 때 철저한 修行을 하여 生死解脫의 永遠한 편안함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香嚴이 云하되 去年貧은 未是貧이요 今年貧은 始是貧이로다.
去年은 無卓錐之地러니 今年엔 錐也無로다.
因 仰山이 云호되 如來禪은 卽許舍兄會어니와 祖師禪은 未夢見在로다.
香嚴스님이 말씀하시기를 昨年의 가난은 가난함이 아니요
今年 가난이 비로소 참 가난이라
昨年에는 송곳 꽂을 땅이 없더니 今年에는 송곳도 없도다 하였는데 仰山스님이 이를 듣고 말하기를 "師兄님이 如來禪은 알았다 하겠지만 祖師禪은 꿈에도 보지도 못했습니다" 하였답니다.
天下의 모든 衲子들이여!
結制大衆들이여!
옛날에는 七年大旱이나 九年大旱이 있어서 七年동안이나 九年동안 내내 비가 오지 않아 大地가 타들어 가서 天地萬物이 말라죽고 無數한 人命이 굶어 죽는 가난이 있었습니다.
이런 가난을 일컬어 송곳꽂을 땅도 없다 하는데 송곳까지도 없다 하면 이 가난은 말 할 수도 없는 源泉 가난입니다. 이 源泉 가난에 이르렀어도 最上乘禪 中에 如來禪 밖에 안된다 하니 어떻게 해야 무릇 祖師禪이 되겠습니까?
(한참 뒤에 )
이 病納이 三十餘年 前에 夏安居 解制를 하고 本寺에 돌아와 막 걸망을 풀어 마루에 내려 놓으려 하자 禪谷큰스님께서 갑자기 말씀하시기를 祖師禪을 내 놓으라고 病納에게 追窮하였습니다.
이 病納은 禪谷스님의 말씀이 끝나기가 바쁘게 걸망을 다시 메고 밖으로 나가 버렸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禪谷스님께 이 偈頌을 바쳤습니다.
池印月鏡合像
五穀熟萬民安
연못의 달그림자 거울이 되어 형상을 머금으니
모든 곡식이 무르익어 萬百姓이 편안합니다
禪谷스님께서 이 偈頌을 보시고 病納에게 드디어 "네가 結制밥값을 다 내고 왔구나" 하셨습니다.
(下座하다)
김원우 기자
wwkim@buddhapi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