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어사 주지 범어사 선원장 등을 역임한 한산당 화엄대선사가 11월 10일 세수 77세 법랍 55세로 김해 동림사에서 원적에 들었다.
1925년 경남 고성군에서 태어난 스님은 46년 동산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수지하고 48년 동산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으며 1955년 상주 남장사 주지, 63년과 72년 범어사 주지 등을 역임하고 제방선원에서 20안거를 성만했다.
칠십칠년 살아온 꿈속의 나그네
꼭두각시 몸을 벗고 어느곳에 가는고
만일 누가 물어도 말할 게 없나니
시넝산 영봉엔 단풍잎이 날으네.
"아이고 추워라 감장사 감도 하나 못팔고 불알만 꽁꽁 얼겠네" 하리라.
라는 열반송을 남겼다.
44명의 직계 상좌를 둔 화엄스님의 영결식은 범어문도장으로 11월 14일 동림사에서 치러진다.
다음은 2000년 3월 22일자 현대불교신문 '가까이서 뵌 큰스님' 코너에 실린 내용이다.
화엄스님(김해 동림사 조실)
욕망의 무게 줄여야 상생
사회의 병 치유 불자 앞장서야
선수행은 정신문명 발전 동력
*약력
·1924년 일본 오사카에서 출생
·45년 오사카 의학전문학교 졸업
·48년 동산스님을 은사로 범어사에서 득도
·73년 범어사 주지
·74년 영구암 주지
·현재 김해 동림사에 주석
‘불교와 사회’라는 주제가 매우 의미깊게 다가오는 요즘이다. 사회라는 말이 사람들이 모여사는 곳 또는 사람들이 모인 뜻이니까 불교의 사회활동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불교NGO라는 말이 귀에 설지 않을 정도로 불교의 사회활동이 어느 때보다 활발하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사회에 회향하는 적극적인 방법으로써 불교의 사회활동이 더욱 활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그런가 하면 한편에서는 탐 진 치 삼독심의 제어가 불교의 궁극이므로 더욱 수행과 기도에 정진해야 한다는 반론이 없는 것도 아니다. 불교의 사회활동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화엄스님께 듣는다.
─불교의 사회적인 활동, 그러니까 인권의 문제, 경제정의, 최근의 총선, 환경, 공동체의 회복을 위한 문제 등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불교의 사회활동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 부처님께서는 어떻게 가르치셨는지요.
▲우리가 불국토(佛國土)라 함은 생명있는 모든 것을 부처의 종자를 가졌다 하여 ‘불(佛)’이라 하고, 이 세계를 정토로 만들어야 된다 하여 ‘국(國)’이라 하고, 이 모든 자연을 ‘토(土)’라 이름한다고 하는 사상이 불국토사상인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의 사회는 거대한 돈덩어리가 굴러가고 있는 모양이예요. 인륜이 무너지고, 상호의 생명을 경시하고, 서로를 불신하여 끝간데 없는 욕망의 탑을 세우려 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배가 가벼워야 침몰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는 간단한 이치를 되새겨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세상 고통의 근원이 집착과 욕망에 있다고 거듭 설하신 것은 세상고통의 해결책도 거기에 있다고 답을 예시해놓은 것입니다. 집착을 놓고 욕망의 무게를 줄일수록 인류가 공멸하지 아니하는 길을 갈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 출가사문들이 누구보다 모범을 보여 인천의 스승으로 뭇 중생들에게 깨우침을 주는 모범적인 인간의 전형으로 살아가야 현대의 불제자의 책무를 다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수행력의 바탕과 기도의 원력을 쉼없이 쌓아서 복잡다단한 현대사회의 구조에 주저없이 뛰어들어 현대의 고통과 병리를 치유하는 데도 각기 맡은 바 수행의 방편을 잘 활용하여 사회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현대인이 앓고 있는 병은 어떠한 종교보다 불교가 그 근본적 치료를 하는데 탁월하다는 것은 서양에서도 불교에 많은 관심을 가지는 것으로 보아 입증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제는 누구를 적대시하고 어느 쪽을 소외시켜서는 살아갈 수가 없는 세상입니다. 공존과 공멸이 욕망과 분별이라는 한 생각에서 갈라진다는 인식을 하여 우리 불교가 적극 나서서 사회의 병을 치유하는데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
─현실적인 방법의 문제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어떻게 해야 하는지요.
▲승려교육은 물론 재가자 법사 포교사 등에 다양한 현실적 교육내용을 보강하여 당장 밀림 속에 던져놓아도 숲을 헤쳐나갈 수 있게 해야 합니다. 부처님의 원력에 힘입은 용기를 오늘을 사는 수행자와 불자들에게 제공해야 합니다. 수행과 중생의 삶이 둘이 아니고, 너무 산속만 고집할 수 있는 시대도 이미 아니기 때문에 역할과 방법을 잘 나누어서 추진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부처님이나 조사스님네들이 현실사회를 모두 부정하고 산에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산에서 안주하고 현실을 무시하는 것은 수행가풍의 전통이 아닌 것입니다. 중생의 고통이 다 해야 보살의 아픔도 끝난다고 했습니다. 현실에 대한 불교의 적응과 대응이야말로 현대사회에서 불교의 운명을 결정할 중대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노인네들은 젊은 수좌들을 잘 돌보아서 우리 사회의 재목으로 길러내는데 힘써야 될 줄로 압니다.
─미래사회의 변화에 대한 기대와 불안이 교차하고 있습니다. 특히 컴퓨터 통신 등의 발달은 필연적으로 속도에 휩쓸리는 현상을 낳고 있습니다. 인간적인 삶을 파괴하고 있다는 비판도 뒤따르고 있는데요. 정보통신의 발달이 우리들의 삶을 더욱 자유롭게 할 것인지, 아니면 파괴할 것인지를 따져보는 일이 필요할텐데요. 스님께서는 어떻게 보시는지요.
▲정보화라고 하는 것도 인간의 욕망과 나태에 기반한 것입니다. 육체적 노동을 정신적 노동으로 바꾸어서 살아가자는 방식쯤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인류문명이 피할 수 없이 그쪽으로 가고 있지만, 그 속력이 가공할 정도여서 두려움이 앞섭니다. 과거의 농경사회는 예측을 할 수 있는 사회였다면, 현대의 사회는 한치의 예측도 불허하는 사회가 된 것입니다. 현대의 과학적 통계가 진리를 표현하는 것은 아닙니다. 너무나 많은 수치들이 난무하며 인간을 안심시키고 꿈을 주기도 합니다만, 통계적 편리 구조가 일시적으로 안락감을 주는 것 같고 지식정보가 삶을 윤택하게 하는 것 같지만 오히려 반면에는 많은 것을 희생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욕망이 배제된 인간의 도덕적 순수성에 기반한 공존의 삶과 상생의 철학이 중심이 되어야 겠지요. 부조화된 정보화가 많은 실작자를 낳는다는 얘기도 들은 바 있습니다.
─속도에 휩쓸리지 않는 삶을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참선수행은 매우 타당한 대안일 수 있는지요.
▲선은 앉아서 솔바람을 코로 냄새맡는 것이 아닙니다. 하루하루가 팔만사천 번뇌라는 도적과의 전쟁인 것입니다. 참선은 번뇌를 부수어 생각이 쉬어지고 또 쉬어지면 대지와 같아져서 거기서 만생명이 잉태되어 나오듯 매우 힘있는 수행법입니다. 현대의 인류문명이 욕망의 축적으로만 달려가는데, 불교의 선수행은 인류가 축적한 위대한 정신문명의 한 형태입니다. 이를 백분 활용하여 대중화하는데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 인간의 욕망이 고도로 자제되는 자리가 자성에 가까운 자리요, 인류공존의 자리인 것입니다.
─불교의 역할이 어떤 종교보다 커질 것으로 보이는데요. 한 종교학자는 “한국사회에서 종교의 사회적 위상은 오히려 강화될 것”이라며 “환경 인권 소득분배 사회복지 등과 관련한 사회비판 및 사회개혁을 이루기 위한 조건으로 종교NGO의 개발이 필요하다”고 주문하고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요.
▲석가모니 부처님의 일생은 맨발로 상징됩니다. 길 위의 삶이었으며, 길 위의 죽음이었습니다. 중생들과 함께 했다는 말입니다. 길에서 맨발로 중생들과 함께 했으므로 비로소 석가모니가 될 수 있었습니다. 왕자의 자리를 버렸음은 기존의 권위와 제도로부터 자유로와졌음을 말해줍니다. 싯타르타가 왕자로서의 지위를 계속 가졌으면 부와 권력을 얻었겠지만 정신의 대자유는 얻지 못했을 겁니다. 자유는 구도, 모든 새로움, 창조, 변화를 이뤄내게 하는 젖줄입니다. 불교만큼 자유와 역동성을 풍부하게 하는 가르침은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불교와 요즘 얘기되는 NGO라는 것은 성격이 닿아 있어요.
어느 시기에나 현상을 유지하려는 힘과 변화를 바라는 힘 사이에는 항상 긴장의 관계가 팽팽해야 합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해방 이후 워낙 어려운 시대를 겪다보니 힘의 균형을 잃어버렸고, 그러다보니 역동성, 변화하려는 힘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했어요. 최근에야 우리 사회에 역동성이 보이고 있어요.
부처님의 가르침을 나, 가정의 울타리를 넘어 이웃으로 흘러들게 해야 합니다. 불교에서 가르치는 핵심적인 이치는 연기법이잖아요. 그러니 이웃의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하지요. 불교NGO라는 것도 뭐 특별한 게 아니고 부처님 가르침대로 이웃과 함께 살자는 것 아닙니까. 특히 사찰은 지역사회에 자리잡고 있으니, 그 지역의 문화적 중심이 될 수 있습니다. 일단 법회와 모임을 자주 해서 사람을 모이게 하고, 그런 사람들에게 일을 찾고 맡기는, 그런 일을 절에서 먼저 시작해야겠지요.
─21세기는 통일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저는 분단의 극복이라는 거대한 산에 오르기 전에 분단에 의해 고통받는 사람들의 상처를 치유하는 일에 소홀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런데 치유의 종교가 되어야 할 불교계의 관심은 너무 미미합니다. 분단의 고통을 어루만지기 위한 스님의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생각이 다른 외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누구도 처벌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섭수와 절복이라는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해결을 했으며, 당시를 사상적으로 치면 인류력사상 보기 드문, 중국식으로 표현하면 백가쟁명의 시기였습니다. 우리의 역사가 특수한 것은 있지만, 이제 이데올로기로 인간의 삶을 구속하는 것은 없어져야 합니다.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30년, 40년 옥고를 치른 분들이나, 고향이 북쪽인 사람들을 보낸다는 운동을 한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이제는 세상이 변하였으니 인간의 최대한의 권리를 보장해주고, 또 국가가 그것을 침해한 적이 있다면 응당한 보상을 해주어야 성숙한 세상으로 갈 수 있을 것이며, 통일도 진정으로 이루어지리라 생각합니다. 우리 불교계에서도 이러한 노력을 기울여 민족의 아픔을 치유하는데 누구보다 앞장서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상구보리 하화중생’이 불자들의 삶의 지남(指南)이라고 하듯, 깨달음을 구하고, 깨달음을 중생들을 위해 회향하는, 그래서 불교는 인간다움을 찾는 ‘인권의 종교’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들의 삶은 그러한지요.
▲앞에서도 부처님의 일생은 맨발로 상징된다고 했는데, 동남아 불교 나라에 가면 부처님 열반상이 많다고 해요. 발은 맨 밑바닥이고, 부처님은 맨발의 삶이었으니 마침내는 하화중생이지요. 인권이란 말이 서양에서 온 것인데, 사람답게 살자는 것 아니예요. 그러자면 최소한 먹고 입고 바람 눈 비 막을 거처가 있어야 할텐데. 그리고 사람으로서의 격식도 차릴 수 있어야 하고요. 그런데 이 세상은 다툼의 이치로 굴러가요. 그러니 재물의 많고 적음, 지위의 높고 낮음, 이런 것들이 사람을 판단하는 잣대가 돼 버렸고, 욕망 채우기를 삶의 목적으로 알아요. 중생계이니 사람들이 똑같이 재물과 지위를 나눠 가질 수는 없겠지요.
불교에서는 실유불성이라 했어요. 만물에 불성이 깃들어 있다는 말인데, 이 말만큼 인권의 중요성을 깨우친 말이 또 있을까요. 재물의 많고 적음, 지위의 높고 낮음을 넘어서 서로의 불성을 북돋자는 것이잖아요. 실유불성이라는 가르침을 모르는 불자는 없을텐데, 불자라고 하는 사람들도 다툼의 이치로 산단 말입니다. 지금 내가 부처님 가르침대로 잘 살아서 절에도 나오고 가족들 무사하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전생에 쌓은 선행의 덕을 보고 있을 뿐입니다.
실유불성이라 했듯, 사람들은 물론 만물에게도 그들의 심성이 다치지 않을까 항상 염려하며 살아야 합니다.
─스님에게 그림은 무엇이며, 무엇을 담아내시려 하십니까? 예술은 삶의 올바른 길로 이르게 하는 유용한 무엇이 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어떤 예술이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힘으로 작용할까요?
▲예술이란 별 것이 아니라 삶이 즐거움이라 생각합니다. 즐거운 삶이 예술인 것입니다. 제가 붓을 들고 50년을 살아온 것은 산사에서 선을 하다 틈틈이 경전을 사경했는데, 그것이 습이 되어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또 노인네가 그림을 그려주면 사람들이 기뻐하고, 그러한 삶이 좋아 시간이 나면 하는 것이지 많은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는 못합니다. 진정한 예술은 부처님의 삶이겠지요.
─봄을 맞아 사람들 사이에 새로운 의욕이 생겨남을 느낍니다. 저희 독자들에게 봄맞이 잘 하라는 말씀 부탁드립니다.
▲봄은 만물이 소생하지만, 병 또한 성해지는 시기입니다. 건강한 삶으로 우리가 힘을 모아 이 자리를 불국토로 만들어봅시다.
대담=정성운 차장 (swjung@buddhapi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