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불교 포교의 개념과 방법론
윤원철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졸업 및 미국 스토니부룩 뉴욕주립대 철학박사. 불교방송 교리강좌 등 진행.
저서 : 종교와 과학 외
논문 : 한국불교의 돈오돈수론에 대하여
- 선문정로를 둘러싼 논쟁을 중심으로 외.
0. 인터넷의 특징
통신과 수송 수단의 발전에 비례해서 시간과 공간의 물리적인 제약이 극복되어왔다. 특히 인터넷으로 대변되는 정보화 시대 통신수단의 눈부신 발전은 바야흐로 온 세계를 실시간(實時間, real time)으로 연결해놓았다. 전신, 전화 등 예전의 어떤 통신수단보다도 훨씬 더 큰 위력을 인터넷이 떨치고 있다. 종교들도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매체의 강력한 힘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자기를 소개하고 포교하는 활동에 적극 나서고 있다. 또는 적어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뒤쳐질 것이라는 압박감을 느끼는 듯하다.
그런데, 인터넷은 단순히 하나의 편리한 통신수단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신자유주의니 뭐니 해서 경제 부문은 말할 것도 없고 모든 것이 경쟁의 역동성에 휘말려 있는 시대에, 그리고 이른바 정보화 시대라고 해서 정보의 선점 확보가 경쟁력의 초점이 된 시대에, 뭔가 조금이라도 움직여보려고 한다면 정보 유통의 마당인 인터넷에 걸려들지 않고서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을 지경이다. 그리고 인터넷은 사용자들로 하여금 그것이 지닌 여러 가지 새로운 특징적 속성에 적응해올 것을 요구한다. 정보 제공 방식 및 수용 방식과 사람 사이의 관계 등 많은 것이 인터넷 이전의 양상과 다르다. 전통적인 방식만을 전제, 고수하면서 인터넷에 뛰어들면 그 막강하고 다채로운 기능을 활용하지 못하고 그 세계에서 소외되고 도태되고 만다.
인터넷 포교에서 중요하게 감안해야 할 인터넷의 몇 가지 주요 특징적 속성들을 꼽아보자.
(1) 인터넷 포교라 하면 지금으로서는 아무래도 웹사이트를 운영하는 것이 대종이겠는데, 웹사이트에서는 기존의 성별(聖別)이 작용하지 않는다는 우선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사찰이나 스님이나 경전 같은 것은 그 자체로 다른 장소나 인물, 문서와는 구별되는 성스러운 권위를 인정받아 왔다. 그러나 인터넷에서는 종교 사이트라고 해서 여느 사이트와 근본적으로 다른 대접을 받는 것이 아니다. 그야말로 수평적으로 동등한, 또는 경쟁의 관계일 뿐이다.
(2) 바로 이 점과 직접 연관해서 감안해야 할 두 번째 특징적 속성은, 인터넷에서 운영되는 사이트의 권위를 가늠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제공하는 정보의 효용성에 있다는 점이다. 개개 사용자들의 필요가 다른 만큼 정보의 효용성 또한 개개 사용자들에 따라 다르겠는데, 그러니까 인터넷 세계에서의 ‘사회적 권위’는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 사이트를 애호하느냐 하는 대중성에 의하여 결정된다.
(3) 꼭 정해진 시간과 장소를 지켜야 할 것 없이, 각자가 필요하거나 편한 때에 어디서든 접속하거나 그만 둘 수 있다는 것이 흔히 꼽는 인터넷의 장점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데 바로 그 점이 이른바 사이버 세계에서 개체들 사이(사이트와 사용자, 사용자와 사용자 사이)의 관계 내지는 공동체가 물리적인 세계의 그것과는 기본적으로 성격이 다르게 되는 원인 가운데 하나이다. 물리적인 세계의 관계에서는 각 당사자들이 처한 시간과 공간을 일치시킴으로써 성사되는 만남이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사이버 세계에서는 그런 조건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번잡한 직접 대면의 관계가 요청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은 불편함이고 인터넷이 그것을 극복케 한다고 본다. 실명(實名), 직업, 나이, 성별, 생김새 등 한 사람의 사회적 정체성을 규정하는 데 중요하게 동원되는 항목들이 사이버 세계에서는 뒷전으로 숨고, 대신에 사용자번호(ID)와 비밀번호가 신분증 노릇을 한다는 이른바 익명성이 또한 사이버 세계에서 개체들 사이의 관계를 물리적인 세계에서의 그것과 여러 모로 다르게 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한다.
(4) 따라서, 인터넷 종교 사이트에 대한 사용자들의 충성도(commitment) 및 결속력(solidarity)은 대체로 일반 종교공동체 조직이나 기구에 대한 충성도에 비해 현저하게 낮다. 그 지속성 또한 매우 낮다. 인터넷 종교 사이트가 사용자들에게 일반 종교공동체의 경우와 같은 양상 및 밀도의 지속적인 충성을 자아낼 것을 목표로 한다면, 그것은 인터넷의 속성상 애초부터 빗나간 목표이다.
(5) 또 하나 중요한 특징으로는, 인터넷을 통해 제공되고 수용되는 정보는 일단 시청각 자료의 형태로 유통된다는 점이다. 가상(假像)을 가지고 현실로 착각하게 할 정도의 이른바 가상현실(virtual reality) 기술이 앞으로 극치에 이르고 보편적으로 보급되면 또 달라지겠지만, 당분간은 지금처럼 주로 문자, 그림이나 동영상, 그리고 이에 소리를 곁들이기도 하는 것이 인터넷에서 유통되는 정보의 형태가 될 것이다. 즉, 아직은 감각적 몰입을 일으키기에는 많이 못 미치고, 주로 知的으로 파악하고 이해할 거리가 주종인 것이다. 이것은 예를 들어 사찰에 몸소 가서 새벽 예불에 참여한다거나 하는 전인적인(‘全機’를 동원한) 신행활동에 비하면 그 범위가 대단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종교의 매우 복합적인 면모와 요소들을 인터넷으로 충분하게 전달한다는 것은 아직은, 그리고 앞으로도 당분간은, 실현되기 어려울 것이다. 아무래도 지적인 자료와 활동이 중심이 되기 마련인 인터넷 종교 사이트는 그러니까 자칫하면 종교에 대한 관심의 초점이 지적인 것에 편향되는 분위기에 빠질 우려가 있다. 종교에 관한 지적인 관심도 그 자체로 나쁠 것이 없으나, 종교생활의 총체성에 훨씬 못 미치는 제한된 관심과 활동에 편향되는 것은 성숙한 신행을 위해서는 좋은 일이 아니다.
0. 인터넷 포교의 기획
인터넷 포교에 나서기로 한다면, 하드웨어와 기술적인 요건들은 물론 당연히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것이고 아울러 위에서 거론한 것을 비롯하여 인터넷의 속성 및 나아가 정보화 사회의 추이를 충분히 염두에 두고 기획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옛적에는 우리의 할머니, 어머니들이 마치 절이 거기 있으니 다닌다는 식으로 생활의 당연한 일부인 듯이 절을 찾고 부처님을 찾던 때가 있었지만, 그렇게만 되지는 않은 것이 이미 오래다. 전국 방방곡곡 웬만하면 어딜 가나 산자락마다 절이 깃 들어 있으니, 소풍이나 수학여행, 답사여행, 관광여행에서는 애써 피하려 하지 않는 한 자연히 절을 찾게 되고 입장료, 사찰문화재 관람료로 불사에 한 손 보태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것을 두고 포교가 자동으로 되고 있다면서 유유자적할 불자는 없을 것이다. 불자에게는 말할 것도 없고 한국 사람 일반에게, 또 나아가 외국인들에게도 우리의 사찰 풍광은 매력 만점이지만,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그런 유산만 깔고 앉아 가지고서는 지금 당대 사람들에게 불법을 알리고 펴나갈 수 없다.
더욱이 인터넷 포교에서는 이미 깔고 앉은 자산이 없고 모든 살림살이를 새로 장만해야 할 판이다. 그리고 성패의 초점은 역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얼마나 지속적으로 깊이 머물러주느냐에 달려 있다. 절이야 찾아오는 사람이 있건 없건 그곳을 지키며 수행하는 이가 있는 한 충분한 존재 이유가 있겠지만, 인터넷 사이트의 존재 가치는 거의 전적으로 효용성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효용성의 극대화를 위해서 우선 고려해야 할 것이 구체적인 목표와 주요 대상을 정하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막연히 어느 누구든 불교에 관심이 있으면 오겠거니, 절에서 무슨 행사할 때면 흔히 볼 수 있듯이 신도들 동원해서 왁자지껄하면 구경꾼들이 기웃거리겠거니 하는 식은 인터넷에서는 안 통한다. 사람들이 확실하고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서비스를 지속적으로 제공하는 것 이외에 다른 변수들은 다 사소한 것일 뿐이다. 그런데 이른바 네티즌의 성분이 어느 특정 세대, 특정 직업에 편향되는 양상은 이제 급속하게 약화되고 있다. 그만큼 인터넷 세계 시민들의 성향과 욕구도 다양해지고 있다. 그 모든 다양성에 남김없이 다 부응하는 갖가지 방편을 한 사이트에 다 담아내려 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고 생각된다. 부처님이야 모든 중생을 대상으로 원음(圓音)으로 설법하셨고 덕분에 모든 중생이 다 똑같이 완벽하게 알아들었다지만, 인터넷 포교 사이트는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목표와 대상을 선택적으로 정하고, 아울러 제공하는 정보와 서비스도 그에 따라 전문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목표 설정과 대상 선정은 맞물려 있다. 목표 설정에 따라 대상 선정이 이루어질 수도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다. 대상 선정에는 여러 가지 기준을 적용할 수 있겠는데, 예를 들면 연령층에 따라 구분하는 것도 그 한 방법이다. 연령층에 따라 대체로 가장 많이 요청하는 정보나 서비스의 종류를 간파하고 그것을 전문으로 하는 것이다. 또 한 가지 가능한 방법은 불교에 대한 관심 내지 관계의 유형에 따라 대상을 설정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미 신실하고 신행에 열심인 불자들을 대상으로 하기로 정할 수도 있고(그 가운데에서도 관심 있는 신행의 종류에 따라 세분하는 것이 좋다), 다른 종교 신자들을 주요 대상으로 할 수도 있다. 과학자들을 대상으로 삼을 수도 있으며, 국회의원이나 기업인 등 특정 직업인들을 대상으로 할 수도 있다.
선정된 대상의 일반적인 성향에 따라 목표를 설정하되 너무 지나친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될 것이다. 예를 들어 다른 종교 신자들을 주요 대상으로 삼는다면, 그들을 불교에 귀의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은 아무래도 비현실적이고 아마도 사이트 운영과 내용에서 자칫 무리가 빚어지기 쉬울 것이다. 그런 경우라면 불교에 대한 오해나 잘못된 선입관과 인상을 풀어주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 낫다. 사이트의 분위기도 겸손하고 개방적인, 서로 선의를 가지고 대하는 것을 세상 최고의 귀중한 가치로 여기는, 그런 쪽으로 만들어가면서 한편으로는 불교적인 것에 대한 감수성의 문을 의도적으로 꽉 닫아 걸어온 이들로 하여금 저도 모르는 사이에 빗장을 스스로 조금씩 벗겨내도록 하는 은근한 노력이 중요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해서 그야말로 다양한 기획의 목록을 만들 수 있고, 자신이 가진 인적 물적 자원 및 정보와 서비스의 종류를 고려하여 그 가운데에서 어느 한 조합을 선택하고, 그것을 자기 사이트의 전문으로 특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어떤 경우든 염두에 둘 것은 앞에서 몇 가지 거론했듯이 사람과 사람이 시간과 공간 속에서 대면하는 일상적인 세계와는 여러 모로 다른 점이 있는 인터넷 세계의 속성과 실정을 감안하면서, 어디까지나 현실적인 수준 안에 목표를 두어야 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그저 막연히 “일체중생을 다 제도하겠다”라든가 완전히 인터넷으로만 신행을 충족하는 새로운 불교, 즉 사이버 불교를 만들겠다 거나 하는 것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인터넷 세계의 실정에 비추어보면 황당한 목표인 것이다.
0. 통합적이고 조직적인 기획과 운영이 필요하다
한국 불교에는 인터넷을 통해 제공하면 크게 환영받을 만한 자료와 서비스의 자원이 결코 적지 않다. 다만 그것을 디지털 자료로 만들고 최대의 효용을 낳도록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제공, 관리하는 데 필요한 투자가 모자란다. 잘은 모르지만 듣기에 인적 자원은 그런 대로 확보할 수 있다고 하고, 당장 시급한 것은 과감한 투자라고 한다.
무작정 자원을 투입한다고 해서 일이 잘 되리라는 보장은 물론 없다. 중요한 것은 인적, 물적 자원의 낭비를 피하기 위한 통합적인 관리, 체계적인 분업 구도를 세우는 일이라 생각된다. 한국 불교가 인터넷 세계에 진출하는 일을 통합적이고 조직적으로 추진할 수 있을 법한 기회가 있었다. 달마넷이 그것인데, 어인 일인지 영 신통치 않다는 평을 받고 있다. 속사정은 잘 모르지만, 사업자는 불교인들의 성향을 잘 몰랐고 종단은 인터넷 세계 시민들의 속성을 잘 몰랐던 것이 맞물려 안이하게 낙관적 태도로 임해서 그렇게 되지 않았나 싶다. 평소 절에서 만나던 불자들도 인터넷 세계에서는 네티즌의 속성을 그대로 발휘한다. 불사라는 구호만 붙으면 열심히 정성을 보태는 그런 신행을 인터넷에서도 그대로 기대하는 것은 오산이다. 네티즌들은 자기의 필요에 대한 효용성이 떨어지면 미련 없이 떠나버리는 권리를 기본 시민권으로 여긴다. 그들을 붙들어두려면 끊임없는 업데이트와 기타 서비스를 쏟아 부어야 한다.
그러므로 사찰별로, 또는 개인별로 서원을 세워서 각자 인터넷 포교에 뛰어드는 것은 현명치 못하다는 생각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자원 투자의 양이 만만치 않은데 포교 사이트의 속성상 효과가 즉각적이고 가시적으로 나타나지는 않기 때문에, 오래 버티지 못하고 의기소침해버리기 십상이다. 불교종단협의회를 통해 모든 종단의 힘을 모아 인터넷 포교의 기획과 운영을 관장하는 기구를 두면 좋고, 그게 곤란하면 각 종단별로라도 그렇게 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어쩌면 지금은 이것이 그 무엇보다도 긴요한, 범종단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는 불사(佛事)가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