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네거리에 흉악범, 파렴치범들을 일렬로 세우고 대규모의 총살형을 집행하였다. 그 처참한 광경이 전국의 방송망을 타고 생중계되었다. 그러한 광경을 생생하게 본 대한민국 국민들은 모두 범죄에 뒤따르는 잔혹한 처벌에 대하여 너무나도 큰 두려움과 경각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 뒤 대한민국 사회는 범죄가 없는 깨끗한 사회가 되었다.”
너무 놀라지 마시라. 가상의 이야기이다. 그렇지만 이 가상의 이야기가 과연 현실성이 있는지 없는지에 대하여는 한번 진지하게 질문을 던져 볼 필요가 있다. 혹 사회의 범죄현상과 병리현상에 대하여 심한 분노를 느낄 때 이런 극단적인 생각을 하거나, 농담으로라도 던져 보신 분은 없는지? 물론 이런 일은 실현될 수도 없고 실현되어서도 안될 것이다. 그런데 과연 왜 이런 일이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되는지에 대하여 어떤 논리적 답을 제시할 수 있을까? 그 답을 제시하기 전에 약간 시각을 바꾸어 우리 목전에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들어보자.
“강도를 붙잡으려던 시민이 강도로 오인되어, 경찰의 총에 맞아 숨졌다. 서울지검 피의자 조모씨의 사망사건에 대한 검찰과 국가인권위원회의 조사 과정에서 피의자와 참고인 상당수가 폭행 등의 고문을 당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러한 일어나서는 안되는 이러한 일들이 일어났다는 것에 대하여 우리의 언론이 연일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렇다면 앞에 든 가상의 이야기와 이 현실의 이야기 사이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는가? 왜 그러한 일이 있어서는 안되는가에 대한 위의 문제에 대한 답과 아래의 문제에 대한 답은 같은가 다른가? 같다면 어떤 점이 같고 어떤 점이 다른가?
얼핏 보면 엄청난 차이가 있는 이야기 같지만, 위 두 예는 우리 국민이 알게 모르게 지녀오게 된 하나의 사고방식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단적으로 말하면 “하면 된다!”는 말이 대변하는 사고방식이다. 어떤 일은 하면 안되는 것인지를 가르쳐 주지도 않고, 어떤 수단을 동원하더라도 결과만 내면 된다는 사고방식…. 바로 이러한 사고방식이 현실적인 것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일 뿐이다. 아직도 우리 사회의 곳곳에 “하면 된다!”는 구호가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정말 아찔한 일이다. 서울지검의 한 수사관이 “솔직히 흉악범이나 파렴치범의 경우 손을 좀 대더라도 성과만 내면 별 문제가 안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라고 말한 것은 우리 사회의 치안담당자들에도 이러한 사고방식이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웅변으로 말해준다. 이런 사고방식이 세력을 넓혀 간다면 처음에 든 ‘광화문 네거리에서의 대대적 처형’과 같은 끔찍한 일을 벌리지 말라는 보장도 없지 않을까? 그 한 가지 일로 범죄 없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면 말이다.
그러나 한걸음 더 나아가 과연 그렇게 하여 원하는 좋은 결과를 낼 수는 있는 것일까? 절대 아니다. 그러한 잔혹한 일은 우리의 마음에 잔혹성과 인명을 경시하는 업의 씨앗을 심게 된다. ‘모든 것은 마음이 짓는다’ 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심겨진 잔혹한 마음의 씨앗이 싹을 틔우게 되면 또 얼마나 많은 잔혹한 일들을 빚어 낼 것인가? 그러기에 열명의 죄인을 놓치더라도 한 사람의 무고한 사람을 죄주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 우리들의 마음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 그런 마음이 바로 우리들 개인, 또 우리 사회의 마음으로 자리 잡을 때 우리 사회가 근원적으로 맑아질 것이다. 그러한 이상적인 논리에 매달릴 수만은 없는 급박한 현실 때문에 할 수 없이 물리적 힘을 동원하더라고 그것은 가급적 자제되어야 한다. 또 할 수 없는 경우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우리가 근본적으로 지녀야 할 ‘마음’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할 때, 이상적인 사회를 싹틔워 낼 우리들의 ‘마음’이 자랄 수 있을 것이다.
성태용 건국대(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