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 초목은 무정물인데도 때가 되면 낙엽져 떨어진다”
송대(宋代)의 대 문장가 구양수가 가을 소리를 들으며 탄식한 말이다. 무정물인 초목도 시드는 때가 있는데 온갖 근심으로 나날을 보내는 사람이야 더 말할 필요가 있겠느냐 탄식이 뒤따른다.
가을을 느끼는 감회들은 참으로 다양하지만, 무언가 쓸쓸하고 허무한 느낌이 많은 것 같다. 웬지 옆구리가 휑하니 빈 것 같은 느낌, 거기로 찬바람이 휘잉~ 불어드는 느낌... 중년을 넘어선 사람들이 대부분 이런 느낌에 처연해 지곤 할 것이다. 거둘 것은 거두고 버릴 것은 버리는 가을의 기운에 자신의 삶을 돌아보기 때문일까? 아니면 바쁜 삶 속에서 잊고 있었던, 어차피 시들어 지게 마련인 생명들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을 아픈 감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일까?
그러나 자연의 순환으로 본다면 낙엽지고 시드는 것도 생명의 한 과정일 따름이다. 가을과 겨울의 심판이 없다면 어찌 봄의 새로운 태동이 있으랴! 그런 각도에서 크게 보면 죽음도 보다 차원 높은 생명의 한 과정일 따름이다. 나의 삶만을 중심으로 하여 보는 삶과 죽음을 넘어서는 큰 생명의 한 흐름을 생각할 수 있다.
무상한 것으로 따지면 어차피 죽어 없어질 것들, 그것들에 대한 사랑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렇다고 우리가 정말 삶과 죽음에 초연하며, 죽어가는 것들에 대해 무감각해질 수도 없지 않은가? 이런 답하기 어려운 문제에 대하여 쉽게 주어질 수 있는 답안은 사랑에도 애견(愛見)과 자비(慈悲)가 있다 하는 것일게다. 무상함을 바로 보지 못하는, 애착에 바탕한 감상적인 사랑과, 무상함을 꿰뚫어 보면서도 집착없이 베푸는 사랑에는 분명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한번 생각하면 집착과 무지 때문에 애견(愛見)이라 불릴망정, 그것이 바로 대비심의 뿌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기에 “원래 그런 것을...” 하는 무심함 보다는 덧없는 것들에 대한 덧없는 사랑이라도, 그 때문에 오는 덧없는 감상이라도 귀하게 여기고 싶다. 큰 깨달음을 향해 가는 길목에서의 조그만 망상일지라도...
성태용(건국대 철학과 교수·본지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