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거처하는 요사채 바로 앞에 밤나무가 수십 그루 서 있다. 늦더위가 아직 미련을 보이고 있는데도 성급한 밤나무 몇 그루는 벌써 초록빛 밤송이가 벌어지는가 하면 이미 땅바닥으로 굴러 떨어진 밤도 적지 않다.
작년 이맘때에 주웠던 밤을 올해도 나가 줍는다. 송이 밖으로 튀어나온 것도 있고 바닥에 떨어졌지만 밤송이 안에 움츠리고 있는 것들도 있다. 밤을 줍는 것도 재미있지만 밤송이 속의 것을 꺼내는 것도 여간 재미있지 않다. 그런 것들은 고무신을 신은 두 발로 양쪽을 짓눌러 빼어낸다.
그래서 밤을 주운 날은 흰 고무신을 다시 닦아야 한다.
밤나무는 해마다 때가 되면 어김없이 열매를 맺는다. 한 켠에 심어놓은 고추밭도 마찬가지. 자연은 이렇듯 일년이 지나면 그동안 공부한 것을 내놓는다.
뜰 앞의 잣나무는 아주 유명한 공안이다. 누가 어느 선사에게 부처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그 대답을 뜰 앞의 잣나무라 했다는 것이다. 공안을 섣불리 해석하는 일은 선가에서는 절대 금물이다. 자칫 진의를 왜곡시키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의심의 덩어리가 생기지 않으면 그 순간 공안은 자격을 잃게 된다. 그러나 오늘은 선가의 방식을 떠나 한번 그 공안을 나름대로 풀어보고 싶다. 왜 뜰 앞의 잣나무를 부처라 했을까.
혹시 그 나무의 모양이 부처님 같았을까, 아니면 그 절의 불상을 잣나무로 조성한 것은 아닐까. 그러나 그보다는 형이상학적인 의미가 분명 숨어 있을 것이다.
하기는 두두물물이 모두 부처라 했으니 잣나무라 해서 부처가 못되라는 법도 없지. 그렇다면 밤나무도 부처님? 밤을 줍기 전에 합장부터 해야겠군.
그런데 요즘 밤을 주우면서부터 내겐 그런 거창한 화두보다는 아주 간단한 문제가 뇌리에 노상 머물고 있다. 잣나무건 밤나무건 때가 되면 열매를 맺는데 어찌하여 나는 아무리 돌아보아도 열매는커녕 한발 짝도 나아가지 못한 채 제 자리에서 맴돌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잣나무는 잣을 키우고 밤나무는 밤을 키운다. 욕심을 쌓으면 욕심이 커지고 어리석음을 닦으면 어리석음이 깊어진다. 사람이 자기를 가장 잘 키우면 무엇이 되는가. 바로 부처님이 아닌가.
하지만 나의 공부는 예나 지금이나 별반 나아진 것이 없이 알량하기 그지없다.
뜰 앞의 밤나무는 내게 그것 하나만 일깨워 주고 오늘도 다 익은 열매를 미련 없이 가지에서 툭툭 내려 보내고 있다.
도수(정업도량 회주, 본지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