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청안청락하신지요. 텃밭에 상추며 쑥갓, 아욱, 가지, 들깨가 한창이겠네요. 태풍이 씻고 간 산록과 계곡이 맨 처음처럼 청정해져 있겠습니다. 성난 듯 푸르러져 있는 숲의 빛깔에 탁한 눈 씻고, 우당탕탕 흘러내리는 물소리에 어두운 귀를 후벼 파고 싶기만 한데, 이 아둔한 몸은 세속에서, 일상적 삶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깥 출입이 거의 없으신 산중 스님께서는 잘 모르시겠지만, 지난 6월 한 달, 이 나라는 제 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월드컵 축구 대회가 열리는 날, 특히 우리나라 경기가 있는 날은 어린이에서 할머니에 이르기까지 발을 동동 구르며 함성을 지르고 손뼉을 쳐댔습니다. 뭔가에 씌어 있는 듯 했습니다. 서울 시청앞 광장과 광화문 일대에서는 붉은 옷을 입고 태극기를 든 수십 만의 젊은이들 열광했습니다.
저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뭔가 이상하다, 전례가 없는 일이다, 저 붉은 티셔츠를 입은 젊은이들은 누구인가, 라며 짐짓 흥분의 도가니로부터 비켜서려 했지만, 우리나라 축구 선수가 한 골을 넣을 때는,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만세를 부르고 말았습니다. 제 마음은, 제 몸은 저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스님, 텔레비전에서 이해하기 힘든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스님들께서 축구 중계방송을 보다가 벌떡 일어나 서로 부둥켜안고, 만세를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뿐만 아니었습니다. 우리나라가 미국 팀과 경기를 벌이던 날 저녁, 약속이 있어서 인사동 가는 길에 조계사에 들렀다가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 대웅전 앞에 대형 스크린과 대형 텔레비전이 설치되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저녁 예불 시간이 끝날 때까지 텔레비전을 켜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위안을 받아야 했을까요? 스크린 너머로 부처님이 보였습니다.
부처님 오신날 내건 축구공 연등이나, 월드컵을 앞두고 장충동 국립극장 가득 스님들이 모여 월드컵 대회 성공을 기원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축구 경기를 보며 환호하는 스님들이나 조계사 경내의 대형 스크린이 낯설 까닭은 없을지 모릅니다.
스님, 그런데,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어떤 사찰의 선방에서는 축구 경기가 열리는 날, 수행을 멈추고 선방 수좌들이 다를 텔레비전 앞에 모여 앉았다는 소리를 듣는 순간, 저는 갑자기 멍해졌습니다. 쏴아 하는 금속성 이명이 머리 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그럴 리가, 선방 스님들께서 그럴 리가….
어떤 이들은 ‘축구 앞에서 열광하는 스님들이 뭐가 이상한가’라며 반박합니다. 불교 대중화의 일환이라고도 말합니다. 불교가 당대 현실과 시차없이 대화하는 진일보라며 기뻐하는 이들까지 있습니다. 스님, 과연 그런 것일까요? 세속적인 모든 인연을 훌훌 떨쳐버리고 대자유인으로 거듭나려는 스님들에게 월드컵 대회가 무슨 상관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스님도 인간이고, 스님도 한국인이다, 라는 초등학교 어린이 수준의 반론이 동원되어야 하는 것일까요?
제가 알기로, 수행이란 일체의 세속적 욕망, 가치, 인연 따위로부터 벗어나 깨달음을 이루려는 지극한 인위입니다. 척추를 곧추 세운 수행자와 ‘욕망의 테마 파크’인 월드컵 대회와는 아무런 접점이 없습니다. 있다면 오히려 이상하지요. 스님들께서 모르고 계셨던 것일까요? 월드컵 축구대회가 상업주의, 국가(민족)주의, 빈부 격차, 노동 착취, 인종 차별과 같은 전지구적인 문제와 전혀 무관하다고 보았던 것일까요?
월드컵 열기에 편승해 불교를 대중화하겠다는 발상은 매우 위험해 보입니다. 불교와 사찰, 스님은 월드컵 열기를 측은해했어야 합니다. 꾸짖었어야 합니다. 그것이 불교가 대중에게 다가가는 정도(正道)가 아닐까요. 불교의 대중화는 멀리에 있지 않습니다. 불교 안에 있습니다. 불교가 불교다울 때, 사찰이 사찰다울 때, 스님이 스님다울 때 저절로 이루어집니다. 불교의 대중화와 불교의 세속화가 부디 혼동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월드컵 열기는 분명한 현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교가 집중해야 할 근본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새만금 갯벌이 매립되고, 북한산 국립공원이 훼손되는 사태야말로 불교가 관심을 가져야 할 본질적이고도 대중적인 사안이 아닐까요? 스님, 저는 가끔 이런 상상을 해봅니다. 비구와 비구니 스님, 재가 불자들 수만 명이 북한산을 빙 둘러서서 침묵의 기도를 올리는 광경 말입니다.
위기에 처한 뭇생명들이 온전해지지 않는 한, 눕지 않겠다며 결가부좌하는 스님의 결연함이 새삼 그리워집니다. 스님, 여름휴가 때 아이들 손을 잡고 꼭 찾아뵙겠습니다.
이문재(시인, <시사저널>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