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혜숙<동국대 교수ㆍ사회복지학>
불교와 페미니즘(Feminism), 왜 오늘날 이 두 가지를 함께 생각하게 되는가. 필자가 대학에서 <불교와 여성>이라는 과목을 가르치고 있는데, 개강 첫 시간에 학생들에게 백지를 주고 그 과목에 대한 소감이나 기대를 자유롭게 적어보도록 하였다. 그러나 많은 학생들이 “불교와 여성이 어떻게 관련되는지 예상치 못하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불교와 페미니즘’이라는 본고의 제목에 일부 독자께서도 어쩌면 비슷한 반응을 하실지 모르겠다. 페미니즘이라는 용어가 마치 여성해방 전사들의 선동 전략을 가르치는 것쯤으로 오해되는 경향도 있었으니까 말이다.
여성연구가 여성을 위한, 여성의 권익을 회복하고 보장받으려는 목적의 여권운동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 때문에 남성들은 물론 여성들 가운데서도 마치 평지풍파(平地風波)를 보는 듯 불편함을 느끼는 경우가 있고, 페미니즘이란 결국 몇몇 여성들이 ‘사내’처럼 싸워서 어떤 특혜를 얻으려는 주장이 아닌가 하는 의심받기도 한다.
그러나 본시 페미니즘은 종래의 인간관ㆍ세계관이 보다 근본적으로 내용의 전환이 필요함을 밝히고, 실제로 그렇게 되도록 요구하는 실천철학이다. 여성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남성을 포함한 양성평등을 실현하고, 주로 경쟁과 독점ㆍ차별의 속성을 가져온 인류문화의 왜곡을 바로잡으려는 진단과 처방이 담겨있는 것이다. 그리고 페미니즘이 가지는 바로 그런 가치 지향 때문에 필경에는 불교와 만나게 되어 있다고 본다. 원론적으로 불교는 만인평등과 무차별을 가르치고 상의상관적 공생과 회향을 가르친다. 석존께서도 예컨대 당시 인도사회에 오랜 전통이었던 신분제도를 부정하고 과감히 계급해방과 아울러 모두에게 공통된 도덕적 행위의 책임을 주장하였다.
근래 우리 사회에서 경영전략이라고 회자되는 ‘상생(相生)’의 원리나, 전문가들이 개진한 세계전망 가운데 3대 화두가 ‘여성ㆍ환경ㆍ시민사회’라는 것에 관련해서, 필자는 그 모두가 불교적 세계관의 지표들이라고 생각한다. 즉, 환경과 인간의 상생은 이미 불교적 중생개념에 속해 있고, ‘시민사회’의 자발적인 공동체적 상생은 승가이념에서 찾을 수 있으며, 여성과 남성의 상생은 그 몸이 단지 인연따라 지어진 것(因緣所造色)이라는 불교적 정체성으로서 성(性)역할에 대한 차별이나 고정관념을 버리게 한다. 이렇듯 새롭게 강조되는 가치관들이 여성주의(feminism)적인 것이며 또한 본래 불교적인 것이라고 보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 경전에는 특히 여성 관련의 설명들이 일관되지 않고 더러는 상충하는 것으로도 보여 지는데, 그 내용이 여성에 대한 긍정이든 부정이든, 모든 교설은 규범적이고도 경험적인 설명으로서 충분히 타당하다는 점을 우리는 잘 이해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규범상으로는 남성이나 마찬가지로 ‘여성이 성불할 수 있다’고 하지만, 경험상으로 그만큼의 수행을 다하지 못하면 역시 남성이나 마찬가지로 여성도 중생일 뿐이라는 것이 당연한 이치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모든 불자에게는 오직 한 가지 본성을 깨우치는 일이 남아있을 뿐이다.
한편, 페미니즘의 경우에 있어서도 그것이 여성만을 인정하는 원리가 아니라 남성과 함께 가는 올바른 세상의 원리이고자 한다는 점은 앞서 말한 바와 같다. 그런데 여성이라고 해서 모두 다 저절로 여성주의자가 되거나 여성주의적 원리를 잘 따르는 것은 아니며, 남성이라고 해서 모두 다 여성주의를 반하는 것도 아니다. 아무래도 여성의 경우에 부조리한 세상의 피해자일 가능성은 크지만, 여성이든 남성이든 누구나 지나온 세상의 왜곡된 원리들 -차별ㆍ배타적 경쟁ㆍ독점 등- 을 벗어버리기 위한 각성과 실천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진정한 불자로서 현재와 미래를 전망하고 새로운 설계를 하고자 한다면, 불교의 근본을 지키면서도 그에 통하는 여성주의(feminism)라는 시대적 방편을 잘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특히 그간에 별나게 드러내지 않고 불교계를 지켜온 많은 여성불자들은 자기 잠재력에 여성주의적 자각을 더함으로써, 한국 불교계와 온 세계의 혁신에 이제는 그 누구보다도 앞장설 때가 되었다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