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종종 죽음을 ‘영원한 안식’으로 표현한다. 이런 메타포가 정당하다면 ‘폭력은 찬양할만한 영원한 생명현상’으로 이해하는 것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정서와 마찬가지로 폭력 역시 인간의 비합리적인 정서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동물의 공격성이 ‘생명촉진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신경과학적 사실을 발견하기 전부터, 철학자들은 폭력성이란 생명력, 창조성의 표현으로 이해해 왔다. 사실 인류의 생존의 역사는 두 가지 투쟁의 기록이다. 하나는 ‘사람에 대한 투쟁의 역사’이고 다른 하나는 ‘자연에 대한 투쟁의 역사’이다. 앞의 것은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뒤의 것은 ‘과학과 기술’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런 폭력을 제도화한 것이 국가이다. 토마스 홉즈가 <리바이어던>에서 ‘정의·불의라는 개념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먼저 강압적인 권력이 존재해야 한다’라고 말했을 때, 홉즈가 의도했던 것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homo homini lupus)’이라는 자연상태의 인간의 폭력성과 이에 대한 국가의 필연성을 정당화하기 위함이었다. 제도적인 폭력장치인 국가의 등장은 폭력의 행사 방식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작은 개인적인 폭력이 보다 큰 제도적인 폭력으로 확대되면서 개인의 생명 권력인 폭력권 행사의 기회가 봉쇄됐고, 긍정적인 생존 감정인 공격성은 사라졌으며, 개인은 영리하지만 유순한 동물이 됐다. 이런 조건을 ‘문명화’라 부른다.
그러나 문명이 진보하면서 제도적인 폭력 역시 더욱 정교하고 세련되게 진화했다. 그런 의미에서 ‘폭력 없는 안정과 평화의 지속’이라는 현대의 보편적 기획은 ‘폭력 장치의 정교화’에 다름 아니다. 문명화된 평화로운 세상이란 보이지 않는 거대한 폭력에 의해 개인의 폭력이 통제된 상황이지, 폭력이 소멸한 상태는 아니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평화란 어떤 형태이든 ‘전체주의적’이지 않고는 도달될 수 없는 이상(理想)이기 때문에, 문명화된 세상에서 폭력은 줄어들거나 사라질 것이라는 국가철학자들의 희망은 아주 순진한 발상이다. 과학·기술 문명이 폭력을 키우는 토양이라는 사실은 아우슈비츠, 히로시마, 체르노빌의 재앙에서 명백히 확인하였다.
지난 3월 발간된 <사이언스> 최신호는 TV시청과 폭력성의 연관성을 밝힌 연구논문을 실었다. 이 연구는 뉴욕주 북부에 사는 707명을 청소년기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18년 동안 관찰한 결과 청소년기에 하루 1시간 이상 텔레비전을 시청할 경우 성인이 되어서 폭력적인 사람이 되기 쉽다는 결론을 얻었다고 한다.
폭력, 그것은 도덕적 일탈일까 아니면 심각한 정신질환일까. 19세기 사람들은 질병이라기보다는 ‘도덕적 정신이상’으로 이해했다. 신경과학과 정신병리학이 발전한 20세기에 와서 그것은 ‘정신병적 성격장애’로 규정되었다. 이런 성격장애는 능동적이고 도덕적인 능력이라고 부르는 정신작용의 도착에 기인한다. 폭력적인 사람의 정서생활은 혼란스러우며, 온전한 도덕적 감정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방출되는 충동과 욕구는 언제나 이기적이다. 행실은 도덕적으로 몰염치하지만, 그러한 행동을 정당화하는 데에는 놀라울 정도로 치밀하다. 폭력적인 인간은 이기적 욕구를 정당화하는 데 자신의 지적 능력을 사용한다.
현대인에게 가장 친숙한 문명의 이기(利器)인 텔레비전이 사람을 공격적으로 만든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디지털 문화가 제도적인 폭력 기구인 국가와 세계체제로부터 해방될 가능성을 준다는 긍정적인 징후와 더불어, 홉즈가 걱정했던 야만에로의 복귀라는 부정적인 징후를 읽을 수 있다. 디지털 문명사회에서 개인의 폭력성의 증대, 그것은 개인적인 폭력이 난무하는 국가 없는 상태에서 살 것인가, 아니면 아우슈비츠와 같은 거대한 인류적 재앙을 불러오는 국가 내에서 살 것인가를 선택하라는 요구일지도 모른다.
구승회(동국대 교수·윤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