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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어> 보리수는 '고련수'
며칠 전에 읽은 중국 오대에 활약한 영조스님의 법문이 너무 인상 깊어 그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어떤 스님이 영조스님을 방문하여 다음과 같은 문답을 나누게 된다. “‘깨달음의 나무 아래서 중생을 제도한다는데 어떤 것이 깨달음의 나무입니까?’ 영조스님이 대답하길 ‘꾸준하게 연마하는 나무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 다시 묻길 ‘어째서 꾸준하게 연마하는 나무와 같습니까?’ 스님이 말하길 ‘본래 훌륭한 말이 아닌데 어찌 채찍의 그림자에 수고를 끼치는가?’”<경덕전등록>

우리는 깨달음이 아무런 노력도 없이 그저 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돈오니까 어느 순간에 불연 듯 다가오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불교적 깨달음이라는 것은 중생을 제도한다는 전제가 있어야 하며, 더하여 꾸준한 수련이 요구되는 것이다. 특정한 천재나 타고난 사람은 다를 수 있다하더라도 그들은 몇몇에 불과한 소수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사실 영조스님의 법어는 시사성이 많다. 요즘 우리 주변에는 부동산이니 증권이니 복권이니 하며 일확천금을 꿈꾸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그것은 누구나 다 얻을 수 있는 기회는 아니다. 통계상으로도 그것은 천만분의 일에 의지하는 게임과 같다. 그렇다면 일확천금을 얻어 화려하게 살려는 생각에 들뜰 것이 아니라 꾸준하게 연마하는 나무를 키워야 하는 것은 아닌가.

그런데 우리 주변은 그런 사람들로 넘치며, 이 사회가 그것을 너그럽게 용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많은 국민들이 위화감 속에서 적지 않은 피해의식과 소외감을 지니게 만들며, 부패한 정치인들의 일그러진 모습이 연일 신문과 방송에 오르내리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 제도라는 이름으로 성실하고 정직한 국민들의 의식을 짓눌러도 되는 것인가. 영조스님의 법어처럼 꾸준히 연마하는 나무를 키우는 사회, 정직한 사회는 우리 모두가 가꾸는 것임을 잊지 말자.

차차석(동국대 역경위원)
2002-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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