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사는 나라 호주가 요즘 편치 못하다. 아프가니스탄, 이란, 이라크,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흘러 들어온, 이른바 ‘난민들’ 때문이다.
수용난민들은 수용시설을 개선하고 사람다운 대우를 해 달라면서 단식농성에 자살위협까지 하고 있고, 국제사회에서의 호주를 향한 비난도 점차 거세지고 있다.
베트남전쟁이후 ‘보트 피플’ 이란 이름으로 등장한 세계적 난민이동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견디기 어려운 여건의 나라에서 삶이 비교적 잘 보장된 나라로 사람들이 무조건 흘러 들어가게 되는, 새로운 현상의 하나다.
난민 문제가 어디 호주에만 있을 것인가. 구미선진국들은 물론, 한국 땅에서도 이런저런 난민문제가 적지 않다.
인구증가, 그리고 정보화가 가져올 미래세계를 아인슈타인은 ‘물이 열을 받아 수증기가 되고나면, 구성분자는 물과 다름없으나 그 사용방법은 물과 같을 수 없다.’고 표현했다던가.
정치적인 부자유나 가난에 쉽게 체념할 수도 있었을 사람들이 발달된 정보 시스템에 힘입어 자신들의 남다른 고통을 알게 되고 분노하며, 그 비참함을 몰아낼 가능성의 나라로 흘러가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근대까지 만해도 ‘물의 성질’이었던 인간 감정이 이제 수증기화 되었다고나 할까. 사람과 사람 사이, 나라와 나라 사이, 그 관계를 푸는데 더 이상 근대적인 방법에 기대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프랑스의 지성인 자크 아탈리는 그의 ‘21세기 사전’에 ‘보디사트바(보살)’라는 항목을 두고 이렇게 설명한다.
“불교의 이상적인 인간형. 열반의 경지에 이르렀다고는 할 수 없지만 중생을 돕기 위해 자신의 안락을 포기한 사람. 어딘가에 고통 받는 사람이 남아있는 한 결코 휴식할 수 없는 사람. (21세기에는) 각자가 관용과 박애의 정신으로 이러한 경지에 이르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렇다. 21세기 인류가 온전히 살아남으려면 모두 보살이 되는 길 밖에 없어 보인다.
김징자(언론인·본지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