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옴표 없는 인용, 그것을 우리는 ‘표절’이라고 한다. 다른 말로는 창작과 학문의 세계에서 행해지는 ‘해적 행위’라 할 수 있겠다. 한 사회의 정신적 자산을 좀먹는 파렴치한 행위다.
세상이 복잡해지는 만큼 표절 행위도 교묘해진다. 아이디어 도용, 재가공, 전재(全載) 수준의 인용 끝에 알쏭달쏭한 출처 밝히기 등.
이런 형태의 교묘한 표절일수록 원저작자에게 입히는 정신적 상처는 깊다. 그리고 그 상처는 어떤 형태로도 보상이 불가능할 뿐 아니라 창작과 연구 의욕의 상실을 부른다.
우리 사회에서 표절 행위가 문제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불교계에서는 그것이 큰 문제로 떠오른 적이 없다. 전문 영역인데다 사제와 선후배로 연결된 관계가 표절 유혹으로부터 서로를 지켜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최근 기자는 불교계의 학술지에 실린 모 지방대학 강사 ㅅ씨의 논문이 명확히 출처를 밝히지 않고 한 불교학자가 번역한 책의 해제 부분과 번역문을 통째로 옮겨 쓴 것을 발견했다.
이해의 폭을 최대화하여 고의성은 없다고 보더라도, 어디서 어디까지가 인용인지를 밝히는 기본도 무시한 채 상당 부분을 옮겨다 쓴 것은 표절과 관계없이 명백한 학문적 게으름이었다.
사실 세상 어떤 영역에서든 앞선 자의 노력에 힘입지 않을 수 없다. 글자 그대로의 독창성이나 고유성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따라서 선행 연구가 많다는 것은 후학들에게 다행일 수도 있고 불행일 수도 있다. 소재의 빈곤 차원에서는 불행이겠지만 짧은 시간에 연구를 심화시킬 수 있다는 측면에서는 다행이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원칙은 간단하다. 인용이 필요한 경우는 정확히 출처를 밝히고, 인용이 대부분을 차지한다면 거기서 멈춰야 한다. 그것이 학자적 양심이다
윤 제 학 (취재2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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