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이 화합하지 못할 때는 각자가 행동을 삼가야 한다. 법답지 못하고 친절하지 못한 일이 있을 때는 항상 참아야 하는 것이며, 부드러운 사랑으로 법답게 노력해야 한다. 화합은 물과 젖을 합한 것과 같으니 불법을 같이 배워 안락하게 공부하고 덕을 쌓아야 한다”
<사분율>에 나오는 부처님의 말씀이다. 이어지는 게송에는 “원수는 크든 작든 앙갚음하지 마라. 원한은 증오로써 사라지지 않나니, 오직 갚음이 없음으로 원한은 사라진다”고 찬송한다. 새삼스럽게 이 말을 인용하는 이유는 모처럼 전개되고 있는 조계종과 태고종의 화해무드가 소기의 성과를 거두어 불교중흥의 초석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기 때문이다.
특별히 종파주의자가 아니라도 많은 미래학자 내지 지성인들은 21세기 정보화시대에 불교의 역할이 막중하리라고 지적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미주 내지 유럽에서 불교도들이 증가하고 있는 것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 다종교 사회의 도래와 함께 불교가 누리던 기득권이 사라진 것은 이미 오래이며, 불교하면 시대에 뒤쳐진 낡은 사상으로 느껴지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 해방 이후 지루하게 전개된 조계종과 태고종의 분규라 말할 수 있다.
신임 태고종 총무원장으로 취임하신 운산스님이 조계종 총무원장인 정대스님을 예방한 자리에서 양대 종단의 숙원을 해결하자는 제안을 했으며, 이에 양측이 원칙적인 동의를 하고, 실무진들에게 세부지침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몇 년이래 이런 시도가 지속되고 있으나, 몇 가지 세부사항에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아 문제를 종결짓지 못하고 있다. 사실 삼보정재는 어느 개인의 것도, 특정 종단의 것도 아니다. 교단 구성원 전체, 한국불교도 전체, 나아가 한국문화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한국민 전체의 것이다.
작은 것에 매달려 지리멸렬할 시간이 없다. 양보할 것은 양보하고, 얻을 것은 얻어서 문제를 해결한 뒤에 내실을 다지는 것이 불교중흥의 초석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번에야말로 두 종단의 합의하에 분규사찰문제가 조속히 해결되기를 고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