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철(동국대 불교문화대 불교학과)
복제 양 돌리가 탄생한 이후 유전공학기술이 세간의 화제가 되고 있다. 우리 불교인들은 이런 유전공학기술에 대해 윤리적으로 어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가?
윤리와 과학의 갈등. 이는 새로운 과학기술이 등장할 때마다 인구에 회자되어 온 아주 진부한 주제이다. 과학은 인간과 자연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일층 향상시킨다는 점에서 긍정적 역할을 하지만 윤리적 측면에서는 야누스와 같이 두 얼굴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유전공학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일까? 먼저, 여타의 과학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인식을 향상시켜 주었다는 점에서 우리는 유전공학의 가치를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원자물리학의 발달로 인해 질량과 에너지를 구분하던 전통적 물질관이 시정되었듯이, 유전공학의 발달로 생명과 무생명, 인간과 짐승을 엄밀히 구분하던 우리의 전통적 생명관이 코페르니쿠스적 변화를 겪게 된 것이다.
그러나 윤리적 측면에서 볼 때, 유전공학기술은 다른 과학기술과 그 성격을 달리한다. 즉, 현재 행해지고 있는 유전공학기술의 경우 그것이 사용되는 과정뿐만 아니라 그런 기술을 개발하는 과정에서도 윤리적 문제가 발생한다.
불교에서는 전생에 죽어 떠도는 중음신(中陰身)인 '간다르바'와 '정자'와 '난자'의 삼자(三者)가 화합되는 순간부터 현생의 생명이 시작된다고 가르치며, 현대의 기독교 신학자들 역시 수정란의 단계를 생명의 시작으로 간주한다. 그런데 인간의 배아를 복제하여 각종 장기(臟器)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인간생명의 시발점이라고 부를 수 있는 수정란을 이용해야 한다. 그리고 이 경우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수정란이 하나의 인간으로 성장되는 것이 아니라, 간이나, 피부 등과 같은 장기의 일부를 생산하는 데 쓰이기 위해 적당한 발육 단계에서 해체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즉, 수정란은 하나의 인간으로 취급되는 것이 아니라 대체장기(代替臟器)를 만드는 재료로 사용될 뿐이다. 그래서 종교인들은 유전공학기술의 개발에 대해 법적인 규제가 가해져야 한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그런데 현재 이러한 비판은 대부분 서구적 종교관에 입각해 이루어지고 있다. 즉, 많은 사람들은 유전자를 조작하는 것이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일이라고 간주하며 유전자 조작 자체를 비판한다. 그러나 유전자에 변형을 일으킨다는 사실 그 자체가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자연에서도 장기간에 걸친 유전자의 변형을 통해 이루어지는 '진화(進化)'가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단기간에 걸쳐 이루어지는 유전공학적 조작과정에서 발생할지도 모르는 부작용만은 경계해야 할 것이다. 또, 복제 양 돌리의 경우에도 대부분의 종교인들은 그 기술이 인간에게까지 확대 적용될 경우 빚어질 위험에 대해서만 우려를 표시해 왔다. 그런데 복제 동물을 만들기 위해서는 기존의 수정란의 세포핵을 체세포의 세포핵으로 대체해야 한다. 즉 수정란 하나를 죽여야만 동물을 복제해 낼 수 있는 것이다. 지금껏 서구의 종교인들은 이런 살생(殺生)에 대해서는 별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불교적 견지에서 보면, 인간의 생명을 살리기 위한 목적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더라도, 동물을 살상하는 행위는 윤리적으로 용납되지 않는다. 불교윤리에서는 '살인'은 물론 동물에 대한 '살생' 자체를 금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험을 통해 좋은 약품을 개발해내어 인간의 질병을 치료해 주는 것은 선업이지만 그 과정에서 동물을 살생하는 행위는 엄연한 악업이다. 선업으로 인해 악업이 상쇄되는 것이 아니다. 과학자는 두 가지 업의 과보를 모두 받게 된다. 과학자는 실험동물의 살상(殺傷)을 통해 좋은 약품을 개발할 수도 있다. 또 수정란을 살상함으로써 이루어지는 배아복제 기술을 개발하여 질병을 치료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인과응보의 이치에 비추어 볼 때, 과학자는 약품과 기술을 개발하여 질병을 치료해 준 '선업'에 대한 과보도 받게 되겠지만, 그런 약품과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저지른 '악업'에 대한 과보 역시 감수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약품과 기술의 개발을 용인하고 장려한 우리들 역시 과학자와 그 과보를 공유하게 될 것이다. '사회'는 공업(共業)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