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물은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마찬가지로, 같은 사안이라도 관점에 따라 상반된 모습으로 비칠 수 있다. 한 예로, 긴 가뭄 끝의 비는 당연히 생명수로 받아들여지지만, 장마 때의 비는 원망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최근 불교계 안팎에서 거센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해인사 청동 좌불 조성 문제도, 관점에 따라 문제의 본질이 뒤바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특히 이 문제로 불거진 불교계의 의견 개진 방법을 두고, 불교계 내분 또는 해인사 대 실상사의 갈등 양상으로 바라보는 시각은 대단히 위험할 뿐 아니라 단세포적이기조차 하다.
결코 이 문제는 불교계의 내분이나 해인사와 실상사의 갈등으로 볼 일이 아니다. 수경스님과 일부 해인사 스님들의 대립은 더더욱 아니다.
물론 드러난 모습으로만 본다면 갈등 국면으로 비칠 수도 있다. 하지만 세상만사가 그렇듯이 사안의 본질은 겉으로 드러난 현상에 있는 게 아니다. 좀더 큰 틀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면,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려는 불교계의 생산적 진통이다.
다만 우려되는 것은, 그 진통의 모습이 아슬아슬하기도 하고 남의 말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볼썽사나운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이다.
더 이상 지엽말단이 본질을 가리는 양상으로 치달아서는 곤란하다. 차분하게, 불제자답게, 과연 어떤 행위가 부처님의 가르침에 어긋남이 없는 행위인지를 생각할 시점이다.
불가 고유의 전통에는, 지극히 이상적인 방식으로 대중의 뜻을 묻는 제도가 있다. 어떤 일이든 재가의 남녀 신도인 우바새ㆍ우비이ㆍ출가 대중인 비구ㆍ비구니 등 이른바 사부대중의 공의를 묻고, 포살(布薩)이라는 이름으로 보름마다 스님들이 모여서 지난 반달간의 행위를 반성하고 죄가 있으면 공개 참회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이제는 불가의 자랑스런 전통대로 여법하게 문제를 풀어가야 할 때다. 선가(禪家)의 말대로 은산철벽을 뚫으려면 태산 같은 의심덩어리를 타파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야말로 대승의 정신으로 좌불 조성을 둘러싼 문제를 여법하게 풀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선종을 표방하는 조계종의 건강한 수행 풍토를 회복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