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남북한의 대립 구도는 남북한 모두에게 민족적 정체성을 상실하게 만들었다. 하나의 민족으로서 공통된 문화적 정서적 모태를 바탕으로 각각의 다양성이 인정되기 보다는, 오직 내 것만이 옳다는 적대적 논리 속에서 민족은 두 조각이 났다. 양쪽 모두 불완전한 반쪽이면서도 자신이 전부이고 저쪽은 완전히 없다는 병적인 의식 구조가 일반화되어, 결국 자신의 뿌리를 부정하고, 자신마저도 부정하는 결과를 낳고 만 것이다.
이제 남북 정상회담 이후 남북이 서로를 인정하는 바탕에서 접근하는 이 마당에 우리가 가장 서둘러야 할 것은 바로 이러한 병적인 의식구조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을 하는데 가장 적합한 가르침을 지니고 있는 것은 바로 불교라 할 수 있다. 특히 한국 불교는 원효성사가 화쟁사상을 편 이후 상대방을 인정하고 다양성을 인정하는 바탕 위에서 커다란 통일성을 지향하는 흐름을 지니고 있다.
이런 훌륭한 전통을 바탕으로 불교계가 남북의 교류 활성화에 앞장서서 통일의 주역으로 나서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북한과 남한, 그리고 해외에 이주해 있는 많은 동포들을 포괄하는 하나의 민족으로서의 한민족의 정체성에 대한 불교 나름의 모색이 있어야 한다. 그 정체성을 세워가는 과정 자체가 남한과 북한을 각각 다양성의 하나로 인식하고, 그 치우침을 지양하고 공통적 지향성을 찾아가는 일이 될 것이다. 우리 중심의 논리에 매달리지 말고 동등한 상대방으로 인정하는 시각 위에서 이루어져야 함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불교도 그것에 집착한다면 오히려 외도가 된다고 하신 부처님의 말씀은 남북한의 교류에 불교가 어떤 자세로 임하여야 하는가에 중요한 시사를 준다. 북한을 무조건 도움을 주어야 되는 대상으로 고정하지도 말고, 그쪽에 도움이 되면서도 우리와 한민족 전체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을 하나씩 이루어야 한다. 불교의 전파라는 조그만 입장에 머무르지 않고, 정치 경제 문화 사회의 다양한 영역에서 서로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을 함께 이루어 나가야 한다. 이러한 자세로 나아간다면 불교가 통일을 앞당기는 주역으로서 역사적 사명을 다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남북 교류의 문제에 있어 불교계가 제 역할을 다 하지 못해온 이제까지의 부끄러움을 떨치기 위해서는 불교의 특성을 바탕으로 하여 고유한 방법론과 영역을 확보하고, 거기에 교계의 힘을 모아야 한다. 불교 교리와 한국 불교의 전통이 지닌 화합과 통일의 정신, 민족문화의 계승자로서 민족의 심성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점 등은 불교가 지닌 큰 자산이다. 이런 가능성들을 현실적인 통일 촉진의 힘으로 발현시키는 불교계의 노력이 있어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