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종철 교수의 '강화천도와 고려대장경 판각'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는 학문적 쿠데타로까지 평가될 만 하다.
이 보고서에는 25년 간의 선배학자의 업적과 행정당국의 권위를 한순간에 뒤흔드는 소장 학자의 소신에 찬 '주장'이 있기 때문이다. 주장이란 다름 아닌 "사적 295호 선원사지(인천시 강화군 선원면 지산리)는 팔만대장경 판각지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 학계는 선배학자의 연구성과를 신성불가침한 경전처럼 취급해 왔다. 비록 의심이 가거나 잘못 내려진 결론이라도 후학들은 모르는 척하거나 정당성을 보강하는 차원에서 연구했을 뿐이다. '스승의 그림자는 밟지 않는다'는 학계의 경직된 문화가 한 몫을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교수는 '경전'과도 같은 판각지의 위치 문제를 들고 나온 것이다. 사실 77년 선원면 지산리 일대가 판각지로 밝혀지고 '사적 제295호 선원사지'로 지정됐을 때, 역사·고고·불교학자들 중에는 이 교수처럼 '위치가 틀리다'고 생각한 학자들은 많았다. <동국여지승람>이나 <강도지> 등 역사·지리서 어디에도 선원면 지산리에 선원사가 있었다는 기록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산리 일대를 선원사지로 지정한 것에 의문을 달고, 그 타당성에 대한 공개 논의를 제기한 학자는 없었다. 선배학자의 연구와 행정당국의 권위에 누가 될까 하여 소극적인 입장을 보여온 셈이다.
물론 업적과 권위에 맞선 이 교수의 학문 태도는 무모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교수가 왜 그랬는지, 학계와 행정당국은 체질상 거부감이 느껴질 수도 있으나 곰곰이 생각하고 고칠 것은 과감히 고쳐야 한다.
이 교수의 주장에 대한 학계와 행정당국의 논의는 5월 이후 본격화될 전망이다. 문화재청은 5월중 문화재위원회의를 열고, 한국선학회는 6월중 월례발표회의 주제로 채택했다. 이 교수의 쿠데타가 잘못 지정됐을 수도 있는 사적지를 바로 잡는 계기가 될 수 있을 지에 귀추가 주목된다.
오종욱 <취재2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