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8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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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가슴이 아팠다
아들이 어머니를 찾아 남으로 왔다. 오직 아들 하나만을 기다리며 절에서 긴긴 세월동안 기도를 하고 살아왔다는 신재순(89) 할머니와 김일성대학 수학박사가 되어 돌아온 아들 조주경(68)과의 만남.

나는 가슴이 아팠다. 그 할머니의 아픈 아픈 시간들이 내 가슴으로 흘러들고 있었던 것이다. 애타는 그리움 슬픔, 피우고 또 피운 향불과 촛불과 수십만 번의 절과 쌓은 공덕과 보시를 섞어 피륙처럼 엮어온 시간.

서울의 한 무용연구소에 춤을 배우러 갔다가 실종되었던 소녀가 북의 한 대학교수로서 50년만에 홍길순 어머니와 언니 동생들을 만나러 오고 있었다.
"옥배야!" "어머니!" "언니!" "누님!"
어머니(88)는 죽은 줄만 알았던 딸을 소리쳐 부르고 딸(62)은 오매불망 그리던 어머니를 부르며 울부짖었다.

55분이면 넉넉하게 날아올 수 있는 평양과 서울 사이의 공간을, 북한의 국기가 그려진 고려항공기는 50년의 피맺힌 그리움과 슬픔의 시간을 넘어 서울 김포 공항으로 날아들어오고 있었다.

한반도의 역사는 잔인했다. 누가 우리 동포들을 저렇게 헤어져 살게 해놓았다가 50년만에 다시 만나게 해주고 있는가. 한반도 한복판에 현대의 눈물겨운 신화 한바탕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남과 북 이산가족 만남의 자리가 마련된 서울 코엑스 종합전시장과 평양 고려호텔에는 수백 개의 신문 방송의 특종감들이 서로 뒤엉키면서 용틀임하고 있었다.

나를 울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든 것은 북에서 온 임재혁(66)이라는 남자와 남쪽에 사는 그의 아버지의 만남이었다. 임재혁은 청구중에 다니다가 의용군에 나갔고, 그의 아버지는 그가 죽은 줄 알고 사망신고를 했다. 50년만에 저승에서 돌아온 듯한 임재혁은 울부짖으면서 아버지를 불렀다. 한데 아버지는 치매로 말미암아 "내 아들아!"하는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반가운 표정 한 번 짓지 못했다. 아들은 슬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채 부들부들 떨고 비틀거리고 땅을 치면서 아버지에게 큰절을 하고 통곡을 했다. 하얗게 지워지고 없는 그 아버지의 기억파일이 한반도의 아픔을 모두 말해주고 있었다.

의용군에 징집되었다가 돌아온 이종필과 그의 어머니 조원호(100)의 만남을 보면서 나는 "아하! 그렇다"하고 탄성을 질렀다. 조원호는 오래전부터 치매를 앓고 있었고, 아들 딸 며느리 그 어느 누구도 알아보지 못했다. 한데 죽었던 아들 종필이가 돌아왔다고 말하자, "우리 종필이가? 아이고 우리 종필이가?" 하고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은 채 말을 한 것이었다. 이종필은 100살난 어머니를 부둥켜안은 채 "지금까지 살아주셔서 고맙습니다"하고 통곡을 했다.

1992년에 발표한 '아, 나의 어머니'라는 시로 이미 남쪽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북의 계관시인인 오영재(66)는 5년 전에 이미 돌아가신 어머니 대신 형과 동생들을 끌어안은 채 울부짖었다. 그는 그 동안 어떻게 견디어 왔느냐는 기자의 물음에 슬픈 앙금같은 말 한마디를 뱉었다. "꿈길에 수만번 오가면 바위도 모래가 된다고 했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오는 길이 이렇게 모래밭길이 된 것이다."

그가 쓴 시 한 대목이 떠오른다. '늙지 마시라, 어머니여…시월아 게 섰거라. 통일되어 우리 만나는 그날까지
2000-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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