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오면 사람들은 산이나 바다를 떠올리며 삼복더위를 달랜다. 가고 못 가는 건 또 다른 문제다. 망망대해의 아득한 수평선에 내려앉은 흰 구름과 발 밑에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자락. 아니면 깊은 산 주름을 타고 내리는 계곡의 맑고 싸늘한 물줄기의 감촉은 어떤가. 매미가 울어주고 나무 잎새들이 산소를 풀풀 내뿜는 숲 속 그늘에 궁둥이를 붙일만 한 반반한 바위 하나를 찾아보자는 것이지, 갈 수 있건 없건 꿈이야 못 꾸겠는가 말이다.
그래서 여름휴가에 비가 끼기 마련인 장마철에는 날씨와 피서객들의 빈 틈 없는 각축전이 벌어진다. 며칠 전 스님네 일행에 붙어서 대천댐 나들이 길에 올랐다. 비가 오는 것도 그친 것도 아닌 눅진한 바람을 안고 가는데 때 마침 일요일이라 나들이 차들이 더러 눈에 띄었다. 푸른 강산을 구불구불 돌아 정상에 다다랐을 때는 가랑비가 심심치 않게 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주차장에 차를 댈 데가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많았다. 우산을 받고 빈손에는 옥수수 한 자루를 쥐고 물을 채우는데 6년이 걸렸다는 댐을 바라보는데 물에 잠긴 산기슭의 곡선이 운치가 있었다. 그 한 장면을 바라보며 역사의 뒤안길을 잠시 되새기고 돌아오기 위해 왕복 2시간을 달렸던 것이다. 귀로엔 양계를 한다는 나환자들의 촌락도 넘어다보았으며 자칭 이나라 최초의 전기 살균 송어양식장이라는 데를 답사했으니 민정시찰을 곁들인 휴가의 한 토막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도 저도 안될 경우를 생각하자. 이열치열이라고 했으니 밀렸던 일을 해치우는 것도 여름휴가를 선용하는 또하나의 방법일 게다. 휴가란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이므로 쉬임없이 되풀이하는 톱니바퀴를 잠시 멈추고 생활에 변화를 가져보자는 것이다. 주변을 말끔히 치우고 묵혔던 일감 보따리를 끄른다. 목덜미를 타고 내리는 땀을 손등으로 문지르며 일에 몰두하다 보면 몸도 마음도 가벼워지는 체험 또한 여름 휴가의 값진 선물이 아닐는지. 언젠가 탄허스님은 월정사 방산굴에서 무슨 어록(語錄)인가를 인용해 가며 '좋아서 하는 일은 피로를 모르는 법'이라고 말씀하셨다.
좋아서 하는 일이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을 뜻함인데 뙤약볕을 등에 업고 농가의 일손을 덜어주는 대학생들은 이 사회의 희망이자 여름 휴가의 최량의 부분이라 하겠다. 얼마 전에 TV화면이 새로운 체험에 도전하는 독일 청년들을 보도했다. 그들은 땀과 먼지로 뒤범벅이 되어 허술한 소극장의 무대설치에 덤벼들고 있었다. 그리고 인터뷰를 하는 마당에서 '색다른 분야의 새로운 체험에 대한 지적 호기심'을 내세우고 있었다.
그런데 보도매체는 연일 피서객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 현황을 고발한다. 먹다 버린 찌꺼기에 폐기물, 규격봉투에서 풀려난 심리적 해이감까지 작용해서 화면에 노출된 쓰레기 더미는 한마디로 끔찍하다. 환경대책의 구호들은 공염불로 돌아가고 실천이 따르지 못하는 상투어가 되어버렸다.
맹자는 독신(獨愼)을 말했다. 남이 보건 말건 내 할 바를 알아서 행하는 사람. 들켜서 벌을 받을까 두려워서가 아니라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지키는 데 성취감을 느낄 줄 아는 멋진 사람들의 나라가 정말로 살기 좋은 세상이 아니겠는가. 사람들이 모이면 서로 지켜 나가야 할 룰이 자생한다. 그리고 우리는 생득적으로 그 룰을 알아차린다. 질서와 예의와 타인을 위한 배려는 하나 같이 나와 너의 행복을 도모하는 데 필요불가결한 조건이다.
'가을'이라는 시 한 편으로 우리의 젊은 날을 사로잡았던 릴케는 여름 또한 '만물이 사지를 쭉 펴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가 길게 내쉬는 계절'이라고 했다. 30년 가까이 강단에 섰던 대학 여름 캠퍼스의 어느 날 오후 오르막길을 천천히 걸으며 나는 릴케의 '여름 예찬'으로 방학동안의 독서삼매를 부추겼다. 수목의 수액이 모근에서 꼭대기까지 오르내리는 소리에 귀를 세우며 나무 둥치의 나이테의 커브를 눈앞에 그렸다. 이 활짝 열린 계절을 무슨 방법으로든지 마지막 한 방울까지 들이마시고 영혼을 살찌우기 바란다. 하여 미구에 다가올 성숙의 계절로 접어드는 데 미진함이 없기를 염원한다.
신동춘(한양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