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방에는 미당 서정주 선생의 친필 액자 하나가 걸려있다.
'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의 유명한 시 '국화 옆에서'의 한 구절이 독특한 필치로 쓰여 있다. 내가 그에게서 이 글을 받은 지 25년 정도가 되었으나 그냥 간직하고 있다가 작년에야 겨우 표구사에 맡겼었다. 어느 날 느닷없이 그도 나이가 꽤 많이 들어 이승을 떠날 채비를 하겠거니 생각하니 불현듯 표구할 생각이 일었던 것이다.
사람은 물론 돌과 호수, 연꽃까지도 그는 모든 만남을 소중히 여겼고 또한 그들이 자신과 더불어 하나임을 노래했다. 이같이 '만남'과 '하나'를 주제로 한 불교적 시상을 간직했던 시인 미당은 그래선지 시 못지 않게 인품이 매우 아름답고 후덕했다.
몇 달 전 선생의 사당동 댁을 찾았을 때 선생은 몸져 누워있는 아내를 보살피고 있었다. 꺼칠한 모습으로 넓은 집을 홀로 지키던 그는 냉장고에서 손수 마실 것을 꺼내와 권했다. 그 걸걸한 웃음은 예나 다름없이 정겨웠다.
그는 젊은 시절, 영호대종사의 문하에서 불교와 문학을 수학하며 스님에게서 크게 영향을 받은 터였는데, 당시 내로라하는 문인이나 명사치고 큰스님 문하를 오가지 않는 사람이 드물 정도였다고 한다.
내가 선생과 자주 만나던 때는 70년대 말 무렵이었다. 영호대종사의 문집을 준비하는데 입적한 운기 대강백과 선생, 그리고 필자가 한동안 머리를 맞대고 번역과 문맥을 다듬는 소임을 맡았던 것이다. 그때의 분위기는 마치 부처님의 경전을 결집하는 그것과도 같이 경건하면서도 신심이 끓어올랐다.
얼마 전 그분이 86세로 이승의 몸을 벗었다. 그리고 선운사 스님들의 독경속에 고향 고창의 아담한 동산에 묻혔다. 한켠에서는 한때 행적이나 종교적 입장차이로 선생을 폄하하려는 의도를 나타낸다. 그러나 투사연하는 그 누구도 오랜 수행을 거친 듯한 선생의 그 아름답고 후덕한 얼굴을 닮은 사람을 나는 그다지 쉽게 만나지 못했다. 그의 얼굴이 참 그립다.
도수(정업도량 회주, 본지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