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창익(인권실천시민연대 사무국장)
정권교체 이후 김대중 정부가 인권을 강조하며 중요한 국정지표의 하나로 언급하고 있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인권'은 우리가 민주주의라는 체제를 유지하고 운영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이다. 나면서부터 존엄하고, 누구도 빼앗갈 수 없고, 누구에게도 그냥 넘겨줄 수 없는 소중한 인권이야말로 우리가 사람답게 살고 있느냐 그렇지 못하냐를 가르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된다.
물론 인권은 해방이니 구원이니 하는 말들보다는 하위개념으로서, 우리들 삶의 기본적인 조건에 불과한 것이다. 인류공동체가 합의한 최초의 쓸만한 문건 '세계인권선언'의 전문과 본문 30개조에 나오는 규정들도 다만 '기본'을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본이 제대로 잘 지켜지는 사회에 살고 있는가? 정권교체 이후 대통령이 자랑하듯 우리나라도 인권선진국에 진입했는가?
물론 김대중 대통령이 과거 정권과 비교해서 진일보한 인권분야의 업적을 자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지만 현정권 이전의 과거정권이야 인권을 진전시키기 보다는 오히려 인권을 억압하고, 국민의 자유를 질식시키는 역할을 앞장 서 했으니 정부가 과거와의 단순비교를 통해 '좋아졌다'만 강변하는 것은 온당한 일은 아니다.
법이나 제도의 보완도 칭찬할만한 것들이 꽤 있다. 여성특위의 신설, 남녀차별금지법의 제정, 민주화운동에 대한 보상, 4.3에 대한 진상규명, 국가인권위의 설립추진이나 거리에서 최루탄이 사라지고, 이근안식의 고문이 사라진 것은 과연 괄목할만한 성과이다. 또한 무엇보다도 중요한 성과는 당연하게도 인권이 정부의 가장 중요한 임무임을 확인하고, 총론에 있어서 제대로 된 방향을 잡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국민의 정부 들어 시행된 이런 굵직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과연 우리 사회의 인권은 좋아졌는가? 인권의 목록을 구체적으로 검토하면 아직까지는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여성의 지위는 날로 향상된다고 하지만, 정보화사회라는 지금 인터넷 사용인구중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 고위직 공무원 중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 국회의원 중에서 여성의 비율을 생각하면 실질에 있어서의 진전은 아직 멀었다. 다른 나라와 비교해도 최하위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비록 현정부 들어 사형집행이 없었다고 하지만 사법살인이라는 비난 속에 사형제도는 끄덕도 않고 있고 42명의 사형수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 공포 속에 시달리고 있다. 시국사건 관련자들을 겨냥한 고문은 없어졌다지만, 아직도 많은 시민들은 검·경의 수사를 통해 강압을 느껴야 하고, 잠 안재우기 등 고문의 형태는 더욱 음성적으로 교묘해졌다. 불구속 수사를 확대한다지만 여전히 구속영장은 남발되고 있고, 부족한 판·검사 인력으로 인해 고뇌어린 재판이 진행되지 않고 그저 조문에만 매달려 있을 뿐이다.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도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지만, 전관예우가 판치는 상황에서 돈있는 의뢰인과 가난한 의뢰인의 차이는 그야말로 구속과 불구속을 가르는 상황이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가난한 사람들의 비아냥도 그치지 않고 있다. 인권의 척도라는 교도소, 구치소의 현실은 너무나 참혹하여 감옥 경험이 있는 대통령이 지도하는 정부의 감옥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실정이다. 청송구치소, 광주교도소 등은 진료비를 아끼기 위해 암환자가 죽어가고 있는데 진료도 안해주고, 죽음을 재촉했을 정도이다.
52년전 공포된 '세계인권선언'에서도 '안전'에 대한 권리를 규정하고 있지만, 우리 사회는 여전히 안전하지 못한 것 투성이다. 씨랜드 참사가 불과 작년의 일이고, 거리 치안은 여전히 불안하고, 가정폭력방지법의 제정에도 불구하고 가정에서의 폭력은 끊이지 않고 있다.
물론 이런 일들이 모두 다 정부의 탓만은 아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인권문제 중에는 정부의 잘못으로 인한 고통도 있지만, 사인(私人)간의 인권유린도 적지 않다. 왜 그럴까?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고, 서로를 배려하는, 즉 서로의 인권을 존중함으로써 자신의 인권도 지키려는 공동체적 의식, 인권의식이 크게 부족한 탓일게다.
우리가 당면한 여러 인권문제를 해결해 가는 동시에 초·중등 학교 등 공교육에서부터 자라나는 어린이, 청소년들에게 '인권'을 가르치는 것이야말로 그 무엇에 앞서 우리가 인권의 진전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구체적인 일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