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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과민성 불감증
방송의 사회적 영향력은 그것의 유통 방식에서 비롯된다. 텔리비젼의 스위치에 손이 닿거나 리모컨의 버턴을 누르는 순간 유통의 준비는 끝난다. 영화를 보기 위해 공을 들여야 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극장을 찾아야 하고, 표를 사야하고, 시간을 기다리는 등의 수고가 있어야 편안한 좌석에 앉을 수 있다는 점에서 영화는 텔리비젼에 비하면 정성이 요청되는 매체임에 틀림없다.

만화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이 성인용 만화를 보기 위해서는 상당한 꼼수를 부려야 한다. 친구의 대학생 형에게 부탁하거나 음성적 거래를 통해서 구입해야 하는 등 다리 품을 어느 정도 팔아야 한다. 그러나 텔리비젼은 그렇지 않다. 텔리비젼 수상기에 붙은 스위치를 켜는 일, 리모콘을 누르는 일을 두고 고생을 했다거나 다리 품을 팔았다고 말하진 않는다. 손이 닿은 순간 유통이 이루어질 정도로 완벽한 유통 방식을 가진 텔리비젼은 그래서 늘 걱정 거리로 인식된다. 특히 아이들을 두고 있는 부모들에게는 금지의 표식을 붙여야 하는 매체로 인식된다.

특유의 유통방식 탓에 텔리비젼에 대한 요청은 참으로 엄격하다. 안방의 화목, 건전한 청소년 문화의 조성, 계층간 조화 등에 대한 엄청난 요구가 텔리비젼에 전해진다. 윤리교사에게나 어울릴 법한 요청들인 셈이다. 텔리비젼 프로그램을 만드는 이들은 이 같은 요청이 버겁다고 토로한다. 우선 재미가 있어야 자신들의 프로그램을 보아줄 터 인데, 너무 재미있어도 탈이라고 하니 기준을 잡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는 볼멘 소리를 한다. 그리고 재미있다고 깔깔 거렸으면서도 돌아서선 욕을 하는 통에 종잡을 수 없다며 시청자들에게 눈을 흘리기도 한다. 제작자 자신들의 윤리 의식을 운위하면서 비윤리적인 사람으로 몰아 붙일 때는 당장이라도 방송을 그만 두고 싶을 정도라며 인간적 고뇌를 비치기도 한다.

완벽한 유통망으로 엄청난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하기에 견제해야 한다는 시청자들의 입장과 너무 엄격한 잣대를 갖다 대지 말았으면 하는 제작자들간의 입장은 서로 맞닿을 수 없을 만큼 평행선을 그리는 처럼 보인다. 하지만 조금만 꼼꼼히 들여다 보면 두 입장은 반목하지 않고 힘을 합쳐 하나가 될 수 있을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제작자들은 자신들이 만든 프로그램에서 퍼뜨린 말 한마디가 전국을 강타하는 모습을 보고 '아 이건 뜬다'라고 감을 잡는데는 익숙하다. 하지만 그것이 갖는 사회적 영향력에 대해선 깊게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는 인색한 것 같다. 나는 제작자들의 이러한 모습을 일종의 과민성 불감증이라고 칭하고 싶다. 사회적 인기에는 민감하지만 영향력에는 둔감하기 때문에 앞뒤가 안 맞는 단어로 그 증세를 칭해 본 것이다. 방송 제작자들의 과민성 불감증은 일종의 병이다. 제작자도, 시청자도 과민성 불감증을 두고 야유를 보낼 일이 아니라 그 병의 근원을 찾는데 노고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바로 그 지점이 서로 힘을 합칠 수 있는 부분이다.

단호하게 말하자면 제작자들의 작업 환경이 과민성 불감증을 초래했다. 제작일선에 내몰려져 날마다 경쟁해야하고, 그 경쟁 결과표를 매일 확인해야 하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성취를 평가받는 제작 환경이 그 병을 불러 일으킨 것이다. 지속적으로 조금씩 몸을 엄습해온 경쟁 중심의 옥죄임의 결과로 과민성 불감증이 깊어졌고 치유가 어려울 정도로까지 이어졌다.

최근 들어 방송의 선정성을 두고 제작자들을 겨냥하는 비판의 목소리가 잦아지고 있다. 제작자들이 몸담고 있는 방송사의 잘못된 평가 방식, 경쟁 방식 등의 제작환경을 고려치 않은 그 같은 지적은 명백한 오조준이다. 시청자와 제작자를 이간시키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제작자들의 과민성 불감증을 초래한 근원으로 돌아가야 한다. 더 늦기 전에 중병의 근원을 제거해내는 일에 매진할 필요가 있다. 언제라도 틀어볼 만한 방송이 되기 위해 온 사회가 그 일에 매달려야 한다. 제작자들에게만 메스를 대고 방송을 수술했다고 말하는 일은 우울증 환자의 겨드랑이를 간지럽힌 다음 치료가 끝났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원용진(동국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2000-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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