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함 속에 천년 법향 가득
예산 덕숭산이 ‘한국의 명산 100’에 들어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도 적지만, 그 사실에 동의하는 이들도 적다. 그것도 그럴 것이 덕숭산은 높지도, 크지도 않은 야산급에 불과한 산이기 때문이다. 흔히 ‘충남의 소금강’이라고들 하지만, 산이 깊은 것도 계곡이 아름다운 것도 아니다. 식생 또한 너무 평범해 따로 설명할 특징 같은 것도 없다. 해발 5백 미터도 못되는 이 산이 우리나라 100대 명산으로 꼽힌 이유는 오로지 천년고찰 수덕사를 품에 안고 있기 때문이다. 산이 절을 만들고, 절이 산을 만든다는 말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재선충 감염으로 소나무 피해 극심
수덕사 들머리는 다른 절에 비해 좀 어수선한 편이다. ‘일주문 밖이 사바’라는 말을 실감케 해준다.
들머리 솔숲이 재선충에 감염되어 군데군데 병색이 완연하다. 소나무의 에이즈로 불리는 재선충은 물과 영양분이 공급되는 도관(導管) 부분을 공격해 소나무를 말라죽게 한다. 재선충은 솔수염하늘소와 같은 매개충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피해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지만, 일단 감염되면 1년 안에 나무가 고사하기 때문에 빨리 손을 써야 한다.
일주문에서 황하정루에 이르는 구간은 근래 새로 조경되었다. 잔디를 깔고 조경수를 심는, 소위 아파트 공원식 조경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절집 조경이라면 어딘가 달라야 하는데, 그게 좀 아쉽다. 수덕사뿐만 아니다. 요즘의 사찰 조경이 다 그런 식이다.
마당에 늙은 느티나무 두 그루와 노송이 자리하고 있다. 석단을 높이려고 흙을 북돋우다보니 나무들 무릎이 땅속에 묻혀버렸다. 그런 푸대접에도 불구하고, 인공물만 서 있는 삭막한 공간을 나무들은 넉넉한 품으로 거두어들이고 있다.
대웅전 두리기둥에 기대어서면 들판과 낮은 산줄기들이 만드는 스카이라인이 눈 아래로 멀리 지나가고 있다. 해발이 불과 3백 미터도 안 되지만, 전망이 시원하고 호방하다. 사람들은 수덕사의 형국을 가리켜, 자좌오향(子坐午向)에 대웅전을 두고, 화국(火局)의 양수(養水)와 장생수(長生水)를 쇠방(衰方)인 정방(丁方)으로 내보내는 명당이라고 한다. 정상에서 내려온 내룡이 토심이 두텁지 못해서 생기가 왕성한 편은 아니지만, 땅의 기운보다는 양기의 흐름이 좋은 향명당(向明堂)이기 때문에 대웅전을 7백 년 동안이나 지켜올 수 있었다고 한다.
덕숭산 지질은 돌이 많은 화산(火山)이다. 그래서 산 이름에 ‘崇(숭)’자를 넣었다고 한다. 그러나 능선의 흐름을 보면 여성의 부드러운 허리를 연상케 하는 토산(土山)이다. 그래서 대웅전을 굳이 맞배지붕으로 올렸다고 한다.
골짝을 끼고 정혜사로 가는 숲길이 나 있다. 계곡 주변의 식생은 참나무류를 비롯하여 느티나무, 굴피나무, 때죽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는 가운데, 고로쇠나무, 산벚나무, 서어나무, 오리나무, 갈매나무, 단풍나무, 누리장나무, 산초나무, 팔배나무, 사람주나무, 참회나무 등이 나타나고 있다.
가을날 이 숲 속은 겨울준비에 바쁜 고마로브집게벌레들의 세상이 된다. 고마로브집게벌레 몸통의 반은 붉고, 반은 검정색이다. 몸길이는 2센티미터에 불과하지만, 우리나라 집게벌레 가운데 가장 긴 집게를 가지고 있다. 이 집게벌레는 썩은 유기물질을 주로 섭취하는 숲 속의 청소부다.
계곡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이따금 암괴(巖塊)를 만난다. 금선동(金仙洞) 암괴 아래 소림초당이 자리하고 있다. 벽초 스님이 스승인 만공 스님을 위해 지은 초당이다. 초당을 지나 향운각 마당에 서면 여태 지나온 숲들이 수덕사 전경과 함께 내려다보인다.
정혜사 해우소는 정상으로 가는 등산로에 접해있다. 비록 벽돌로 쌓긴 했지만, 중층구조에다 재래식 구조로 된 전통해우소이다. 거기서 나오는 걸로 1천 평 채전밭 가꾸고 있다. 그러나 낙엽이나 왕겨 같은 매질(媒質)을 사용하지 않아서 전통해우소라고 부르기엔 조금 뭣하다.
크지않은 산에 많은 암자
정상에 오르면 건너편 이쪽저쪽으로 가야산과 용봉산이 듬직하니 자리하고, 내포평야가 멀리까지 발아래 펼쳐져 있다. 금북정맥은 속리산 일맥이 북진해서 안성 칠장산에서 서진한 산줄기이다. 천안 광덕산-청양 칠갑산-보령 오서산-홍성 일월산-예산 덕숭산-서산 가야산으로 이어졌다.
덕숭산은 산의 규모에 비해 암자를 많이 거느리고 있다. 아래쪽에서부터 환희대, 선수암, 극락암, 견성암 등이 모두 1백년 안에 지은 비구니 승방이다.
견성암은 대지에서 건물이 차지하는 면적 비율(용적률)이 높은 편이다. 근래에 시멘트로 지은 승방이 경내에 또 들어섰다. 눈에 보이진 않지만, 몇 년간은 시멘트가 내뿜는 독성이 방사마다 그득할 것이다. 비구니처소일수록 시멘트 냄새를 멀리 해야 하는데, 적이 안타깝다.
숲의 단순화와 쓰레기로 사찰환경 훼손 심각
견성암에서 정혜사로 가는 길은 솔향 그윽한 숲길이다. 주변의 참나무들이 소나무를 못 살게 군다는 이유로 군청 산림계 사람들이 나와서 참나무들을 베어내고 있다. 하지만, 숲이 소나무만으로 단순화되었을 때 병충해를 입게 되면 그 숲은 순식간에 전멸되고 만다. 그리고 숲의 단순화는 곤충상과 조류상의 다양성을 저해하기도 한다.
스님들이 낙엽을 쓸어내는 동안 처사님은 경내 구석구석을 다니면서 쓰레기를 거두어 수레에 싣고 온다. 모아놓은 쓰레기들을 분석해보니 생수병과 음료수병, 음료캔과 맥주캔, 일회용 컵, 과자 포장지, 비닐봉투… 등등 거의가 태울 수도 묻을 수도 없는 1회용 화공제품들이다. 쓰레기를 내지 않는 생태사찰을 만들기 위해서는 관광객들에 대한 규제가 어느 정도 강화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절에서부터 자판기를 철거하는 선행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경내에 약수가 있는데도 굳이 ‘죽은 물’을 팔아야 쓰겠는가.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