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9. 1.11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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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의 장면들】<22> 수덕사 대웅전
섬세한 공예미 갖춘 고려가람

기둥과 기둥 잇는
쇠꼬리 모양의 들보
정교한 비례구성 백미

◇수덕사 대웅전의 빼어난 아름다움이 잘 드러난 측면. 구조적으로 꼭 필요한 부재들로만 이루어졌으면서도 정확한 비례체계와 완벽한 조화로 공예품에 가까운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나라의 종교를 불교로 삼았던 고려시대는 불교문화가 가장 번창했던 때다. 웅장하면서도 섬세한 고려시대의 불화나, 이제는 박물관의 유물로만 전해지는 불교 공예품을 보면, 고도로 발달한 당시 불교 예술의 힘과 정신에 넋을 잃는다. 불교 건축도 대단히 발달하여 중국의 사신으로 개경에 온 서긍이란 사람은 개경 가람들의 뛰어난 감동을 <고려도경>이라는 책에서 전하고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고려시대의 가람이 온전히 남은 곳은 하나도 없고, 단지 몇 개의 목조 건물들만 흔적으로 남아있다.

남한 땅에 남아있는 고려시대 건물로는 봉정사 극락전, 부석사 무량수전과 조사당, 영천 은해사 거조암의 영산전, 그리고 예산 수덕사 대웅전 정도다. 북녘 땅에도 성불사 응진전 정도가 남아 남북한 모두 합해 꼽아도 열 손가락이 남는다. 그렇다고 해서, 남아있는 건물들이 고려시대 건축 가운데 가장 우수한 것들은 아니다. 수덕사 대웅전이나 봉정사 극락전은 갖은 전란과 사회적 탄압 속에서도 기적적으로 보존된 우연의 결과일 뿐이다. 고려시대를 대표할 만한 불교 건축들은 당연히 고려의 수도였던 개경에 있었을 것이고, 남아있는 예들은 극히 평범한 시골 사찰들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안되게 남아있는 고려시대의 건물들의 그 당당한 기품과 아름다움은 대다수 조선시대 건물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탁월하다. 현존하는 고찰들과 건물들은 거의 대부분 조선시대의 것들이며, 그나마 99%는 17세기 이후의 근세 작품들이다. 그러나 예술적 가치란 수적인 우세로 판가름되지는 않는다. 몇 안되는 고려시대의 범작들은 압도적으로 많은 조선시대 건물들보다 한차원 높은 건축적, 예술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 보물들이다. 그 가운데서도 수덕사 대웅전은 고려시대 건축이 추구했던 이상들을 잘 보여준다. 수덕사 대웅전은 한마디로 잘 짜여진 커다란 가구이며, 건축이라기 보다는 공예품에 가깝다. 대웅전의 아름다움은 측면에서 잘 드러난다. 5개의 기둥은 건물의 벽면을 정확히 4등분하고 있으며, 가운데 높은 기둥으로 나누어지는 정사각형의 벽면은 정교한 비례 체계를 구성하고 있다.

지붕틀은 기둥들과 정확하게 결합되어 있어 한치의 빈틈도 보이지 않는다. 무엇보다 아름다운 것은 기둥과 기둥 사이를 연결하는 곡선형의 휘어진 들보이다. 쇠꼬리 모양으로 휘어졌다고 해서 ‘우미량’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부재는, 기둥 사이를 단단히 얽어매 전체 건물을 일체화 시키려는 구조적인 이유도 있지만, 그 섬세한 아름다움 때문에 장식적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오해받을 정도다. 훌륭한 공예품은 쓸데없는 장식을 붙이지 않는다.

일상생활에 불편함이 없도록 꼭 필요한 요소들로만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쓰기 편하고 튼튼하기만 하다면 예술품이 될 수는 없다. 그 최소의 요소들을 가지고도 아름다움을 창조한 것만이 예술품이 된다. 수덕사 대웅전의 모든 기둥과 들보들은 불필요한 것이 없다. 구조적으로 꼭 필요한 부재들로만 이루어졌으면서도 그 부분부분에서 미학적 가치를 높이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고, 전체적인 구성도 정교한 비례체계에 따라 이루어졌다. 현존하는 고려시대 건물들은 전부가 이러한 공예적 정신에 충만해 있다.

지금이야 덕숭총림으로 중요한 가람이자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지만, 고려시대에는 전국에 수없이 많은 산골 사찰이었던 이 곳에 이처럼 훌륭한 건축물이 남아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수덕사 대웅전을 통해서 고려시대 건축과 예술의 그 높은 수준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작은 사찰 건물을 짓는 지방의 이름없는 건축가나 장인들도 완벽한 기술은 물론, 뛰어난 심미안을 가졌던 위대한 시기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예산 수덕사는 여러 가지로 일화가 많은 가람이다. 경허스님과 만공스님의 주석처로 근세 불교의 선풍을 크게 일으킨 성지이며, 개화기의 여류 시인으로 장안의 화제를 모았던 김일엽 스님이 수행하고 입적한 곳이기도 하다. 절 입구의 수덕여관에는 현대 미술계의 거장, 이응로 화백이 조각한 바위그림이 남아있기도 하다. 이처럼 세인들의 주목을 받으며 관광명소로 성장한 수덕사에 일대 중창불사의 바람이 불었다. 대웅전 앞을 가로막는 거대한 강당을 지었는가 하면, 호젓하게 올라가던 오솔길은 커다란 연못과 거창한 돌다리로 바뀌었다.

거대 강당은 대웅전을 3배쯤 뻥튀기한 형태였고, 돌다리는 불국사의 청운교 백운교를 흉내낸 모사품이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고려 장인들의 공예적인 솜씨도 없었고, 섬세한 정성도 없었다. 물량만이 투여된 현대의 천박한 과시와 거친 기계적 솜씨만이 있었다. 다행히 이 흉물들을 정리하여 원래의 모습을 되찾으려는 노력이 진행되고 있지만, 한번 파괴된 모습은 쉽사리 복구되지 않는다. 고려시대의 솜씨를 능가할만한 예술적 건축적 역량이 갖추어지지 않는한, 일단은 보존에만 충실해야 하지 않을까. 우선은 그 보존 노력이 선조들의 유산을 파괴하지 않는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

김 봉 렬<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 교수>

2000-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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