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9. 1.11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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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편액을 찾아서】<33> 성재의 수덕사·청룡사 편액 (끝)
수덕사…칠보문 단청 변죽 달아
명부전…전각 비해 규모 작은편

◇예산 수덕사 조인정사의 <수덕사> 편액.

◇안성 청룡사 <명부전> 편액.

성재 김태석(惺齋 金台錫, 1875~
1953)은 일제강점기에 주로 활동했던 서예가이자 전각가로 일찍이 중국, 일본 등을 왕래하며 견문을 넓히고 작품 활동도 하였다. 그가 중국에 머물던 38세에는 당시 총통이었던 원세개로부터 재능을 인정받아 국무원 비서직에 있으면서 옥새(玉璽)를 비롯한 수많은 인각(印刻)을 하였다고 한다. 이후 그는 15년 동안을 중국에 체류하며 많은 활동을 하였고, 귀국 후에는 ‘대동한묵회’를 조직하여 전람회를 여는 등 서예와 전각을 통한 후학 양성에 힘썼다.

성재는 전서(篆書)와 예서(隸書)를 특히 잘 썼으며, 해서(楷書)는 안진경체를 본받았다고 한다. 또한 그는 정학교, 유한익, 강진희, 오세창 등과 함께 근대 전각의 오대가로 꼽히며, 한국 근대의 전각을 현대로 이어준 인물이기도 하다. 성재의 사찰 편액은 예산 수덕사 <수덕사>, 안성 청룡사 <명부전>, 하동 쌍계사 국사암 <명부전>, <칠성각>, <옹호각> 등이 대표적이며, 이외에도 해인사 ‘자통홍제존자사명대사비(慈通弘濟尊者四溟大師碑)’가 그의 글씨이다.

예산 수덕사 청련당 아래쪽, 조인정사에 걸려 있는 <수덕사> 편액에는 ‘불기이천구백칠십이년 칠십이수 성재 김태석(佛紀二千九百七十二年 七十二  惺齋 金台錫)’이라는 관지와 두인을 비롯한 2과의 방인 도서가 있다. 이 편액은 성재가 72세 되던 1946년에 쓴 글씨로, 액판의 크기에 비해 비교적 넓은 칠보문 단청의 변죽을 달고 있다. 이 편액의 글씨는 단정하면서도 조형미가 돋보이는 예서이다.

안성 청룡사 <명부전> 편액에는 두인을 비롯하여, 액판 좌측에 ‘성재(惺齊)’라는 관지와 ‘김태석인 성재(金台錫印 惺齊)’라는 방인의 도서가 찍혀 있다. 이 편액은 전각에 비해 그 규모가 아주 작은 편인데, 변죽을 이중으로 한 것이 그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 편액의 글씨를 쓴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대략 성재가 중국에서 귀국하여 활동하던 1950년을 전후한 때일 것으로 보인다. 편액의 글씨는 청인풍(淸人風)의 유연(柔軟)한 소전(小篆)이다.

안병인<대한불교진흥원>

2000-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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