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생활 35년 동안 이런 일을 당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이는 완전 눈의 초점을 잃고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 같았습니다. 그 순간 저는 병실을 옮겨 달라고 매달리며 호소했습니다. 수간호사가 병실을 옮겨주더군요. 2인실로 옮기자마자 전신 촬영이 시작됐습니다.
그 위급한 와중에 문득 청와대 육영수 여사님께 호소의 글을 올려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호소의 글을 올리자 급물살을 탄 듯 그 소식이 전해졌고 병실까지 찾아오신 실무자분들에 의해 경위조사와 현지답사가 시작됐습니다.
그때 제 나이 41세, 그이는 51세였습니다. 그 배려의 온정, 대한민국 국모의 갸륵한 미덕은 지금도 잊혀지지를 않습니다. 남편은 생명의 위기를 간신히 넘기고 완쾌된 몸으로 15년간을 일선 학교장으로 혼신의 힘을 다했습니다. 4남매 모두 대학까지 마치게 했죠. 그러나 그이는 65세 정년을 1년 남기고 영영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갔습니다.
장남은 배를 타는 마도로스입니다. 항상 망망대해에 활주로를 힘차게 긋고 국위 향상의 수출 품목을 싣고 나르는 바다의 사나이죠.
그런데 이런 일이! 배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한 것입니다. 배 접안을 하기 위해 배에 로프를 거는 순간 발을 헛디뎠는지 떨어졌다고 했습니다. 옆 항구에는 배의 행렬이 줄지어 있었는데 높이가 5층 아파트 높이에 해당했답니다. 그 소식을 전해 듣고 김해공항에 아들을 싣고 가려고 앰뷸런스와 휠체어가 대기하고 있는 그 자리에, 아들은 떨어져 쓰러진 그 자리에, 엄마인 저는 멀뚱히 서 있었습니다.
염불만을 외웠습니다. 관세음보살만을 간절하게 찾았습니다. 부처님의 가피 속에, 보살님의 보호 속에 절대 기적은 나에게 올 것을 확신하는 용기가 스러져가는 것을 부여잡았습니다. 동료에게 업혀서 나타나는 아들을 본 나는 혼비백산 쓰러질 것만 같았습니다.
다시 용기를 냈습니다. 나에게 좌절의 순간은 절대 없다는 확신을 갖고 중얼중얼 염불만 했습니다. 그런데 엑스레이 촬영이 끝나고 진단을 맡았던 의사는 놀라워했습니다.
그 높이에서 떨어진 발목과 다리에 작은 금이 약간 갔을 뿐 다른 곳은 이상없이 괜찮다는 소견이 나온 겁니다. 의사말씀이 “내가 병원생활 몇 십년해도 이런 경우는 처음 본다”는 말을 하는 것을 보고 가슴을 쓸어내리며 부처님 가피를 실감했습니다.
의사의 말을 듣고 아들이 “떨어지자 밑에 큰 튜브가 내 몸을 받쳐 주었다”는 것입니다. 아들이 떨어지는 자리에 튜브가 있었던 것 역시 인연의 지중함이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엄청난 사고에도 부처님 가피로 살아난 아들은 20년 무사고 경력 기관장으로 망망대해를 힘차게 달리는 엔지니어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라 경제에 한 몫 하는 애국자가 됐다는 생각에 가슴이 뿌듯합니다.
산다는 것은 고(苦)에서 고(苦)로 이어지는 길입니다. 그러나 개인의 강력한 도전과 인내는 자기를 구할 수 있는 계기와 용기를 갖게 합니다. 그 저변에는 불교에 대한, 부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과 힘이 깔려있는 것이지요. 이런 뜻하지 않은 불행에서 교묘히 재생의 길을 걷게 하는 인연의 힘은 지금 생각해 보면 지극하셨던 어머님이 발심하셨던 불심의 기운이 남아있는 것이 아닌지 싶습니다.
1989년 지아비가 작고 한 후 큰 아들네에게 살림을 내어 주었습니다. 별 탈 없이 잘 살던 아들 내외였습니다. 그런데 1998년 겨울이 닥칠 무렵인 11월말쯤 며느리가 동생의 사업부도를 막기 위해 시댁에 의논도 없이 집을 저당 잡혀버렸습니다. 그뿐이 아니라 채무를 크게 남겨 놓은 채 카드빚이며 잔뜩 아들에게 지워놓고 이사 가듯이 짐을 몽땅 챙겨 집을 나간 겁니다. 그 연락을 받고 와 보니 손주 남매는 텅 빈 집안에 굴러다니는 먼지 속에서 엉엉 울고 있었습니다. 손주들은 한창 사춘기에 접어드는 중3년생 초등6학년이었습니다.
저는 남편 작고 후 봉사활동 간부를 맡아 열심히 봉사활동을 하면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사회 안에서 내가 받은 만큼 내 몫을 하고자 10년 가까운 기간 동안 혼신을 다해 봉사하며 살았는데 내 집에서 이런 일이 생기다니 어이가 없고 울분이 터졌습니다. 남을 돌보느라 내 집안을 돌보지 못한 것 같아 죄스러웠습니다.
그때 내 나이 64세. 노년 고개에 접어든 겁니다. 부채 독촉은 빗발치는 듯 했고, 아들이 목숨 던져 일하고 받은 봉급 봉투를 들고 (사조직 은행) 창구 직원에게 몽땅 내 놓고 뒤돌아설 때는 미친 사람처럼 돌변하고 말았던 시절이었습니다. (계속)

































.gif)
.jpg)




.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