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정구업진언을 외며 구업을 참회할 때면, 다시는 구업을 짓지 말자고 숱하게 다짐합니다. 그리고 알게 모르게 또다시 구업을 짓는 자신의 모습에 부끄러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일주일에 한 번 있는 모포건조일을 떠올립니다.
평소 제 아무리 깨끗하게 이부자리를 사용하려고 노력해도 막상 햇볕에 모포를 말렸다가 둘씩 짝을 지어 모포의 양끝을 붙잡고 털어내면 언제 그런 먼지가 묻었는지 밀가루 포대를 털듯이 먼지가 풀풀 날리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아무리 평소에 마음을 올바르고 깨끗하게 유지하려 해도 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에 먼지가 켜켜이 쌓여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며 마음 닦는 공부에 가일층 노력을 기울이겠노라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자신의 마음에 쌓인 먼지를 털어 내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고 살아가는 동료들을 보면 참으로 안타까운 심정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그것이 다름 아닌 지난날 저 자신의 모습이기에 남의 일처럼 지나칠 수가 없어, 아직도 어둠과 미망 속에 헤매고 있는 동료수용자들에게 희미한 빛이라도 전하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망아래 참회의 글을 열고자 합니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저는 회색 담장과 쇠창살로 둘러쳐진 이 부자유의 공간에 갇혀있다는 사실이 꿈만 같이 느껴지곤 했습니다.
범죄의 세계와는 거리가 먼 지극히 평범하고 착실한 사회인의 한 사람으로 살아왔던 저였습니다. 그랬기에 살인이라는 끔찍한 죄를 저질러 무기수로서 끝도 없는 어두운 터널을 지나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는 사실이 남의 일로만 여겨질 뿐 도저히 자신의 현실로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뜻하지 않은 엄청난 불행을 당했을 때 사람들은 흔히 그것을 ‘운명의 장난’이라고 표현합니다. 저 역시도 제게 닥친 이 불행을 저주받은 운명의 장난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남들에게 욕을 먹고 손가락질을 당할 일을 일삼으며 살아왔다면 그것을 당연한 응보라고 받아들일 수도 있었겠지만 그와는 정반대의 삶을 살아왔다고 자부하고 있었기에 저 자신이 애꿎은 운명의 희생양이 되었다고 밖에 달리 생각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모든 불행의 원인을 운명의 탓으로만 돌리자 그럴수록 제게 닥친 현실은 더욱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저는 모든 것을 부정하고 자포자기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일 제가 맹구우목의 인연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나 모든 것이 연기의 원리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임을 깨닫지 못했다면 지금쯤 저는 구제불능의 문제수로 희망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 쌓아왔던 악업의 실체를 깨닫고 난 후 저는 완전히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가 있었습니다.
저는 경기도 일산시에서 농사를 천직으로 삼아오신 부모님 슬하에서 2남 2녀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풍족하지는 않아도 크게 어려울 것 없는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에는 아버님의 농사일만으로는 집안을 꾸려나가기가 벅차 부득이 어머니께서 서울로 야채장사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저는 학교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 아버지의 농사와 어머니의 장사를 도왔습니다. 비록 몸은 힘들고 고달프지만 오늘 흘린 땀 한 방울이 내일의 미소가 되리라는 믿음 아래 열심히 노력하여 무사히 고등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그 뒤 군에 입대하여 3년간의 국토방위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고 귀향하였습니다.
제가 군복무를 마치고 고향에 돌아와보니 조상대대로 농사만을 지어오던 고향 땅에 개발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급기야 신도시로 지정되면서 땅값이 오르는 통에 농사밖에 모르던 사람들의 손에 꿈도 꾸지 못했던 큰돈이 쥐어지게 되었습니다. 그와 함께 순박하기만 했던 고향 사람들의 마음에 사치와 향락이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루 아침에 재벌 2세라도 된 듯 사치와 방탕의 늪에 빠져들었다가 가진 돈을 순식간에 모두 날려버리고 고향 땅을 떠나야 했던 이웃들도 부지기수였습니다. 그 무렵 한 기업체에 입사한 저는 학업과 집안일을 병행하며 땀 흘리던 지난날을 생각하며 열심히 근무했습니다. 곧 결혼을 하여 두 아이까지 둔 단란한 가정의 가장으로서의 본분에 충실한 삶을 살아갔습니다.
결혼을 한 뒤 직장 동료들과의 술자리도 마다한 채 집과 직장만을 오가다시피 하던 저에게 1994년 12월 28일은 결코 잊을 수 없는 불행을 안겨 주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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