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쓰기까지 많이 망설였다. 혹자는 이 글을 읽고 너무나 행복한 넋두리를 한다고 비아냥거릴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1993년 불교와 인연을 맺은 이후 너무나 많은 부처님의 가피를 받았기 때문에 대자대비하신 부처님의 가피력을 소개하고 싶어 이글을 쓴다.
1993년 가을 동료 여직원으로부터 불교교양대학이 있으니 한 번 나가볼 의향이 없느냐는 권유가 있기까지 난 불교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아니 종교 자체에 관심이 없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 친구 따라 교회에 몇 번 다녀 본 적은 있었지만 종교에 대해 관심이 있어서도, 기독교에 관심이 있어서도 아니었다. 단순히 친구따라 놀러 간 것 이외의 의미는 없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어머니와 외가에서는 불교와 인연이 많았던 것으로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런 환경은 내가 불교에 관심을 갖게 한 배경이 되었다.
어찌됐건 이렇게 인연이 되어 부처님에 대하여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교양대학에 나가려면 불교에 대하여 알아야 된다는 생각으로 <금강경> <천수경> 등 기초서적을 읽으며 1년을 끌다가 1995년 중앙불교대학(대전시 동구 자양동 소재)에 입학하여 그 다음해에 졸업을 했다. 이렇게 부처님과 맺은 인연은 다시 한 번 인생을 열심히 살아 보라는 부처님의 말씀이자 내 자신과의 약속으로 여기며 살고 있다.
나는 지체장애인이다. 2살 때 소아마비를 앓은 후유증의 결과다. 다른 사람들처럼 가난했고 아버님을 일찍 여읜 탓으로 어려서부터 남다른 고통을 겪고 성장했다. 그런 가운데서 역경을 딛고 고등학교, 대학교를 나오고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여 직장도 있고 결혼해서 자식을 키우는 가장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도 다 대자대비하신 부처님의 가피력일 것이다. 1994년 4월 고혈압으로 쓰러졌는데 다행히 생활하는 데는 지장이 없도록 회복되었다. 이것도 부처님의 가피력임을 알고 있다.
비록 가족하고는 직장관계로 떨어져 생활하고 있지만 분명 내 생활에는 활기가 넘치고 있으며 매사 일을 함에 있어 긍정적인 사고방식으로 일을 하고 있다. 지난 세월을 돌이켜 생각해보면 오늘이 있게 해준 부처님께 진심으로 참회하며 감사드린다.
하지만 이렇게 되기까지 지난 세월은 참으로 참담했다. 인간으로서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벼랑 끝까지, 아니 벼랑에서 천길만길 낭떠러지로 떨어졌다가 천신만고 끝에 올라왔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다. 물론 그 원인은 전적으로 내 자신에게 있었지만, 그 때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알콜중독! 어쩌면 이 단어가 내 성장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찾아온 단어, 아니면 숙명적으로 찾아온 것이 아닌가 싶다. 내 불행은 그렇게 시작됐다.
술을 처음으로 먹어본 것이 초등학교 6학년시절 아버지 기일날이다. 제사가 끝나고 음복을 할 때 장남은 한잔해야 한다고 해서 막걸리를 반잔 마셨고 트림을 할 때마다 이상한 역겨움 때문에 그 이튿날까지 고생을 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술을 먹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였다.
사춘기 시절을 맞아 이성에 눈뜨기 시작했을 때 지체장애는 한마디로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었다. 수도 없이 극단적인 생각을 했었고, 수없이 많은 밤을 그런 고민으로 보냈다. 하지만 그 무엇도 선택할 수 없었다. 그러면서 당장의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 어리석게도 술을 입에 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이 알콜중독으로 이어지면서 모든 것을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놓으리라고는 꿈엔들 생각하지 못했다.
허약한 체질 때문에 많은 술을 마시지도 못했으며 조금만 먹어도 토하기 일쑤였다. 토하면서 괴로움과 외로움을 토해낸다고 생각했으니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었는지…. 남들보다 더한 가난 그리고 수줍음이 많던 나는 하고 싶은 말을 마음속에 묻어두며 생활했다. 그리고 술로 마음을 달래는 것이 유일한 위로 방법이 되었다.
29세 된 해 중매로 어렵사리 결혼을 했다. 사실 장애인이 결혼을, 그것도 아주 정상적인 여인과 결혼을 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그것이 현실이 되기까지 당사자인 내가 겪었던 아픔이란 이루 말 할 수 없다. 그것은 보통사람의 상상을 뛰어넘는 고통이다.
중매결혼이기에 정들이며 사는 것이 과제였고, 서로를 아는 노력이 필요했다. 우리 둘은 노력했고 그리고 아들 하나, 딸 하나를 얻고 얼핏 남들이 보기에는 행복한 것처럼 살았다. 사글세 150만원짜리 방을 얻어 생활했으니, 지금 생각해 보면 처자식 굶기지 않으려고 노력도 많이 한 것 같다.
그러나 어느 일면에는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분노와 슬픔과 그리고 직장에서 오는 스트레스 때문에 술 인생은 계속 이어졌다. 27년간의 결혼생활을 하면서 술로 인하여 몸은 서서히 망가지고 부부지간의 갈등은 깊어만 가고 자식들과의 정도 멀어지고 인간으로서 버틸 수 있는 의지가 무너져 내리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이 ‘나’라는 아상을 버리지 못하고 집착에만 매달렸다는 사실을 알기까지는 많은 세월이 흘러야 했다.
서서히 불행이 찾아오기 시작한 것이 1994년 봄부터였다. 막중한 업무도 업무지만 상사와의 갈등으로 심한 스트레스와 술로 인하여 쓰러져 병원에 실려갔다. 나는 그때서야 혈압이 높다는 사실을 알았고, 잘못했으면 죽음이 왔으리라는 생각을 하며 오열을 했다. 당시 내 나이 마흔 셋이었다.
하지만 더 큰 고통은 가족들의 냉담함이었다. 하루하루를 술로 사는 남편과 아버지를 어떤 가족이 곱게 봐줄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런 자책 보다는 가족들에게 버림을 당한다는 생각을 하니 너무 슬프고 외롭고 고통스러웠다.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독한 소주보다 순한 술을 마셨지만 그래도 술을 먹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혈압약은 혈압약대로 먹으면서 술을 마셨던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직장업무가 잘 될 리 만무였다. 점점 업무의욕이 떨어지고 스트레스는 쌓이고, 급기야 사표를 쓸 일보 직전까지 갔다. 그런데 바로 그때 직장을 그만두면 당장 먹고 살 길이 막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체 장애인이 해야 할 일은 그리 많지도 쉽지도 않았다. 너무도 비참했다. 세상이 원망스러웠고, 내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나라는 존재가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견디기 힘들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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