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지 부처님을 떠올리면 눈물이 나온다. 만약 지금 부처님이 살아 계시다면 천리길이라도 한달음에 달려가 만나 뵙고 싶다. 그래서 궁금하고 답답한 것들을 모두 다 여쭙고 해답을 구할 수만 있다면….
확연히 깨쳐서 지혜롭게 살 수만 있다면 어떤 고행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결심은 이미 오래전부터 서 있다. 어떻게 해야 깨칠 수 있는지, 아니 아직도 나와 남을 분별하고 있는 미혹한 중생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있을 것만 같다.
26살에 결혼을 할 때까지만 해도 나는 종교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다. 시댁에 들어가서 보니 시어머니께서는 독실한 천주교인이셨고, 5형제 자식 중 한 사람이라도 천주교 성직자가 되길 바라셨다. 하지만 어느 자식도 그 뜻에 따르지 않자, 시어머니는 나에게 천주교식의 결혼식인 혼배성사를 받도록 했다. 시아버지께서 종교를 강요하지 말라며 시어머니를 만류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시어머니는 일주일동안 여러 번 성당엘 가셨고, 나 역시 시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여러 차례 성당엘 갔다. 하지만 마음이 끌리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성당 안에 있다가 슬그머니 빠져나와 성당 근처 뚝방에 우두커니 앉았다가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이었다. 오후 4시쯤, 시어머니는 저녁을 빨리 먹고 성당에 가자고 재촉을 하셨다. 하지만 성당에 가고 싶지 않았던 나는 늑장을 부리며 밥상을 차리면서 시간을 끌었다. 그러자 화가 난 시어머니는 밥상을 뒤집어 엎으셨다.
이제는 더 이상 내 마음을 감춰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어머니께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어머니께는 죄송한 일이지만 성당에 가면 분위기는 장엄하지만 신부님의 말씀에도 제 마음이 움직이지는 않아요. 싫고 좋고의 문제가 아니라 별다른 느낌이 없어요. 그리고 자꾸 강요받으면 오히려 반발감만 생겨요.”
남편 역시 시어머니의 뜻과는 달리 성당에 가는데 전혀 관심이 없었고, 나 역시 마찬가지니 시어머니께서도 어쩔 수 없었던지 “나중에 마음이 생기면 그때 성당에 가자”고 하시면서 뜻을 굽히셨다.
그 뒤 남편이 강릉으로 발령이 나면서 강릉생활을 시작했는데, 어느 날 천주교인 2명이 집으로 찾아왔다. 시어머니께서 내 교적(성당 신도 명부)을 강릉의 한 성당에 보내서 오게 된 것이다. 시어머니는 아직도 나를 성당에 나가게 하겠다는 마음을 접지 않으신 것이다.
나는 그 신도들에게 내 뜻을 분명히 전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는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시어머니의 간곡한 부탁을 들어 드리지 못해 죄스럽기는 했지만 마음이 가지 않는 종교에서 신앙생활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났고, 갑자기 절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에 한 절을 찾았다. 과연 절에서는 사람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마침 내가 절에 간 날은 법회가 있는 날이었다. 아무도 반기지는 않았지만 스님의 법문을 들을 수가 있었다.
그런데 스님의 법문을 들으면서 순간적으로 내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 이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귀가 번쩍 뜨였다. 말로 어떻게 표현할 수는 없지만 ‘내가 찾던 것이 이것이구나’하는 확신마저 들 정도로 스님 법문이 강렬하게 다가왔다.
돌아볼 것도 없었다. 주저 없이 부처님께 귀의하겠다고 결심하고 그 때부터 부처님 생애와 사상, 교리 등 닥치는 대로 배웠다. 하나라도 더 배우려고 시간을 아껴가면서 공부했고, 그러면서 공부하는 재미도 들어 정말 신나게 공부했다.
배우면 배울수록 깊이가 있고 과학적인 것이 불교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면서 불교의 우주관이나 생사관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됐다. 특히 연기법은 너무도 훌륭한 가르침으로 다가왔다. 불교계 언론매체가 있다는 사실을 안 것도 바로 이때였고, 새벽예불을 마치고 본격적으로 경전공부를 시작한 것도 이 때였다.
어떤 때에는 잠이 부족해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면서도 경전 공부를 하려고 밤새 라디오 불교방송에 귀를 기울였고, 염불을 하면서 잠을 자기도 했다.
그렇게 공부하면서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다. 오만한 행동으로 남을 무시했던 일, 미워하고 원망하고 슬프고 가슴 아팠던 여러 가지 일들이 결국엔 나에게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 그렇게 무지와 집착의 업으로 보낸 많은 날들을 참회하면서 비우면서 내 자신을 바꾸어야 한다는 결심이 섰을 때는 참으로 홀가분한 마음이 들었다.
다행히 아이들도 절에 가는 것을 좋아했다. 큰 아이를 해인사 수련회에 보냈더니, 나중에는 동생들까지 모두 데리고 갈 정도가 됐다. 사실 아이들에게 절에 갈 것을 은근히 요구했는데, 그러면서 시어머니와 똑같이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반성을 한 적이 많다. 잘못하다가는 내가 그랬던 것처럼 아이들이 불교를 더 싫어하게 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아이들에게 더욱 조심스러웠다. 이런 엄마의 생각을 눈치 챘는지, 아이들은 오히려 내게 고마워했다.
이런 것이 공부고, 이런 것이 연기법이라고 생각하니 부처님 법이 그렇게 고맙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그렇게 신행생활이 이어졌지만 초보불자였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실천해보고 싶은 욕구가 일었다. 그러던 차에 한 도반으로부터 삼천배 철야정진을 해보자는 제의를 받았다. 처음에는 자신이 없었지만 한 번 도전해보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막상 해보니 쉽지 않았다. 다리가 너무 아파 계단을 오르내리지 못할 정도가 되면서 말로만 듣던 삼천배 철야정진이 쉽지 않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몸은 내 몸이 아니었지만 정신은 더욱더 또렷해진다는 것이었다. 처음 2천배 동안 절을 할 때마다 되새겼던 서원은 2천배를 넘어서면서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내가 있음이 느껴졌다. ‘수행이 깊어지면 이렇게 되는 걸까’ 하는 의구심을 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깊은 환희심이 일어났다.
지금도 첫 삼천배 철야정진은 잊혀지지 않는다. 평생을 살면서 그 때처럼 기쁘고 환한 감정을 느껴본 적은 없었다. 부처님 법을 만난 것에 감사하고, 부처님 법 안에서 숨 쉴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한다. 그리고 부처님께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시간과 기회가 있다는 것이 나를 행복하게 한다.

































.gif)
.jpg)




.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