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70. 4.25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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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체투지(중)/최현숙(서울 서초구 양재동)
오체투지 십만배 수행은 올 여름 내내 진행되었다. 1000배를 하는데 대략 3시간이라고 계산한다면 그간 나는 무려 300시간을 절을 하며 보내는 것이다.
난 그 시간을 ‘내부수리’라고 부른다. 내부수리기간 300시간. 그 동안 눈, 귀, 코, 혀, 촉감과 의식의 육근에 집중하여 그 기관에 닿는 여섯 가지 대상의 12경계를 싫다거나 좋다는 편견 없이 받아들여 내면의 깊은 의식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했다.
아울러 내 육체와 마음의 주인공을 뒤에서 조정해가는 ‘보이지 않는 뒷자리의 운전자(Back Seat Driver)’가 누구인지를 주목하기로 했다. 내가 수행을 안 하면 뒷자리 운전석에 전생의 업이 들어앉아 업력(業力)대로 살다죽는 삶을 살아갈 테고, 수행을 잘해서 신구의 삼업을 스스로 조절해 간다면 원력이 이끄는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마음으로 되뇌었다.
매일 1000배씩 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도 1만배를 채울 때마다 마음에 둔 사찰을 찾아 부처님께 공양도 올리고 감사히 회향했다.
마음에 둔 절은 16년 전 지장기도를 시작할 때 다닌 철원 심원사인데, 그 때의 절박했던 심정을 기억하고 상황이 이렇게 변화한 것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으로 십만배 오체투지를 마치는 날까지 다니겠다고 서원했다. 16년 전, 지장보살님을 모시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 발원대로 심원사 안의 천불전에 한분을 모시게 돼 내게는 더 의미 있는 사찰이다.
조용한 빈 밤에 홀로 좌복을 깔고 절을 하면 한편의 필름처럼 지난날이 휘리릭 뇌리를 스쳐간다. 지난날,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났던 것은 내가 가장 힘들었던 때였다. 아니, 부처님을 만나자 지난 과거생의 악업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불심도 약하고 지혜도 없던 나는 과거업의 급류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맥을 못 추며 허우적거렸다. 심원사를 찾아 지장보살 기도를 시작한 것도 그 때였다.
1990년 여름이었다. 작은딸이 4살 때였다. 당시 남편은 다니던 직장을 나와서 사업하겠다고 고향인 목포로 혼자 내려갔다. 그동안 모아둔 재산을 다 쓰고도 사업이 일어서지 않자, 남편은 아내인 내게 상의도 없이 친정어머니와 형제들의 돈을 빌려다 썼다.
나는 남편 대신 집안의 경제를 책임지고 낮에는 아이들을 지도하고 살림을 꾸려가며 육아를 담당했다. 부부는 함께 있어야 한다지만 남편조차도 낯선 목포에는 내가 일자리를 찾을 기반이 없었기에 무작정 아이들을 데리고 내려갈 순 없었다.
2년을 그렇게 지내는 사이 갑자기 남편의 태도에 변화가 왔다. 남편은 다른 여자와 깊은 관계에 있었다. 3년을 억지로 사업을 이끌면서 한때는 동업자였던 사람들과도 채무를 지게 되자 그 사람들로부터 몰래 회사관계 서류를 빼돌려 내연녀와 둘이서 이리저리 숨어 다녔다.
결국 남편은 내연녀의 집에서 발각 되었다. 그렇게 사업이 파탄나자 남편은 가정으로 돌아오는 대신에 아내인 나를 원망하고는 아이들까지도 버린채 그 여자를 택했다.
그 와중에 나와 친정동생은 회사채무보증인으로부터 빠져야하는데도 남편은 그 일에마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악운은 계속됐다. 나중에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간 회사가 재부도나자 회사채무보증인에서 빠지지 않았던 나는 그 빚마저도 고스란히 떠맡게 되는 악운까지 겹쳤다.
한 때는 내연녀를 찾아가 인간적으로 하소연하면 돌아설까 하는 마음에 목포까지 찾아간 적도 있지만 타인의 마음은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남편 역시 똑같이 무모해서 설득이 되지 않았다.
내가 그런 악몽같은 상황 속에서 오직 할 수 있는 일은 두 딸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비록 혼자지만 아버지와 어머니의 역할을 한꺼번에 같이 하는 길 뿐이었다.
내가 흔들리면 안된다는 생각에 강하게 마음먹고 가정방문교사, 번역, 가게운영, 유치원 교사 등의 일을 닥치는 대로 맡아서 집안을 꾸려나갔다.
너무나 힘든 날이면 “두 딸이 커서 사회에서 인정받을 수 있을 만큼 교육을 시킬 능력을 제게 주세요”라고 간절히 희망하며 멀리 철원의 심원사까지 기도를 다녔다.
친정어머니는 딸의 불행 때문에 마음도 상하고 몸도 많이 아프시다 돌아가셨다. 어머니 장례식 때에는 남편에게도 연락을 했다.
그러나 어머니의 49재를 지내고 난 후에는 내면에서 남편과 나, 그리고 그 여자 사이에 어떤 정리가 필요하다고 느껴졌다.
그 즈음에 목포에 있는 어느 절의 스님이 날 찾아왔다. 스님끼리는 서로 알고 지내기 마련인지 그 스님의 절로 놀러갔던 나의 재적사찰 스님이 그곳에서 남편을 만난 것이다. 그리고 그 스님에게 이런저런 사정을 알려줘서 찾아왔다 했다. 꼭 한번 와서 남편을 만나보라는 그 스님의 말을 듣고 그 절을 찾아갔다가 그곳에서 남편과 여자까지 만나게 되었다.
‘뭐 때문에 여기까지 찾아왔냐?’며 따지는 남편과 여자에게 “나야 말로 묻고 싶은 질문인데 언제까지 이렇게 숨어 지낼 것인가?”라고 물었다. 그 여자는 당돌했다. “차라리 감옥에라도 집어넣으려면 넣어라”식의 말을 쏘아댔다.
“아이들에 대해선 아버지로서 부양의 책임이 있으니 형편 되는대로 양육비는 보내 달라”는 내 의견에 그 여자는 오히려 “아버지가 능력 없으면 엄마가 맡아 자식을 길러야지”하며 기세가 등등했다.
턱수염까지 도인처럼 기른 남편은 입만 꼭 다물고는 부동자세더니, 그날 밤에 자신들의 거처로 날 끌고 가서 양육비에 대한 담판을 내고 싶어 했다. 그러나 그 절의 스님은 날 그대로 내 보내면 무슨 불상사가 생길지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이 보살님은 내 손님으로 왔으니 두 사람은 그만 가시오”라며 그 둘을 보냈다.
그 일을 끝으로 서울로 올라온 바로 나는 더 이상 미련을 갖지 않기로 작정하고 남편과 이혼하기로 결정했다. 남편에 대해서 내 남편이라는 생각을 놓았더니 증오심도 적어졌다. 어린 아이들에겐 “아버지는 없지만 엄마가 대신 너희들을 사회인이 될 때까지 학교도 보내고 맡아서 보살필 거야. 생활이 넉넉지는 않겠지만 힘들다고 너희들을 포기하진 않을거야”라고 안심시켰다. 그리고 그 약속을 지난 16년간 지켜왔다.(계속)
2006-11-13 오후 2:0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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