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70. 4.25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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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닦은 복전 (상)/하용이 (한국은행 홍콩사무소장)
지난날을 되돌아보면 참 많은 것을 느끼게 된다. 아집과 망상에 가득찼던 젊은 시절에 천 년 만 년 살 수 있을 것만 같았던, 모든 복이 내게로 올 것만 같았던 터무니없는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깨달았을 때 오히려 편안했던 마음. 어렸을 때 어려운 가정형편을 극복하기 위해 일심으로 기도하시던 어머니의 모습. 불교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부처님 법을 배우기 시작했던 학창시절. 한국은행 불교회 활동을 할 때 가르침을 주셨던 스님들. 모두가 다 잊을 수 없는 기억들이다. 타국 땅에서 떠오르는 지난 기억들이 이렇게 고스란히 내 삶 속에 남아 있다는 것이 기쁘고 반갑다.
타국 땅에서 부처님 법을 되새길 수 있다는 것이 위안이고 자랑이다.

홍콩 땅을 밟은 것은 올해 4월 1일이다. 한국은행 홍콩사무소장 발령을 받아 첵랍콕 공항에 도착한 지 한 달 만에 부처님오신날을 맞았다. 그 때 고등학교 3학년 시절 들었던 청담 스님의 말씀이 왜 그렇게 또렷하게 떠올랐는지….
타국에서 맞는 부처님오신날, 그동안 살아왔던 세월을 돌아보니 복들 더 많이 지어야겠다는 생각이 한국에 있을 때보다 더 간절하게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청담 스님 말씀이 귓가에 맴돈다.

중생은 누구나 다 수명이 허공과 같아 시작과 끝이 없고
중생은 누구나 다 복이 우주에 가득해 있고 없음이 없다.
다만 스스로 지은 바에 따라 누릴 뿐이다.

홍콩의 생활은 생각보다는 편안하다. 집값이 워낙 비싸기 때문에 서울보다 훨씬 좁은 아파트에서 월세를 내며 살고 있기는 하지만 다행히 아파트가 산중턱에 있어 아침마다 50분 동안 산 정상을 오르내리면서 염불을 하노라면 부처님 세상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게다가 자연경관도 좋아 자연과 하나가 되니, 그 기분을 즐기는 것이 여간 재미있지 않다. 누가 홍콩생활의 가장 큰 낙을 꼽으라면 주저없이 이것이라고 자신있게 말하곤 한다.
아파트가 위치한 뒷산은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이름을 딴 ‘빅토리아 피크’인데, 기차를 타고 정상까지 올라 갈 수 있는 홍콩에서 제일 높은 유명관광지로, 한자로는 ‘태평산’이라고 한다. 정상에는 ‘사자정’이라는 동양식 정자도 있다.
아침마다 태평산 사자정에 오르내리면서 체중이 5㎏이나 줄었고, 덩달아 욕심도 줄었다. 3년 전 과천에서 서울로 이사 가면서 많은 것을 버린다고 버렸지만 욕심은 버리지 못했었는데, 이곳을 오르내리면서 매일매일 다짐을 하곤 한다. ‘서울로 돌아갈 때는 욕심까지도 버리고 가겠다’고.
산에 오르내리면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만나는 사람 누구에게나 먼저 인사를 했다. 이곳 사람들과 친해지고, 이곳 정서에 익숙해지기 위해서였다. 그랬더니 이제는 만나는 분들이 먼저 반갑게 아침인사를 건네 온다. 하심한다는 것이 이렇게 편안한 것인지 이곳에 와서야 비로소 피부로 느낀다. 그리고 어머니께 감사한다. 어머니의 불심과 정성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내 어머니는 부산에서 태어나 자수성가하신 아버지와 결혼해 5남 2녀를 두셨다. 우리집은 행복했다. 형제들은 우애가 좋았고, 동네 사람들과도 친근하게 지냈다. 게다가 아버지 사업도 번창했고, 친가나 외가 친척들 모두 편안했다.
집은 항상 친척들로 북적였고, 어머니는 그렇게 사람 사는 냄새를 좋아하셨다. 어떤 사촌 형제들에게는 학비까지 대주셨고, 며칠씩 묵고 가는 인척들에게는 아버지 몰래 차비까지 두둑히 챙겨 주셨다.
심지어는 형 친구들까지 먹이고 입혀주셨는데, 그 중에는 소위 출세한 사람들도 상당수 있다. 남부러울 것 없는 환경에서 여유있는 마음을 가지고 계셨던 부모님은 우리 형제들에게는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 아닌 정신적인 지주였고 버팀목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평안하던 집안에 문제가 생겼다. 부산 광복동에서 큰 빌딩과 해운대에 많은 부동산을 소유하고 사업가로 제법 이름을 날리던 아버지가 40대 후반에 사업을 서울로 확장하시다가 실패한 것이다.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다.
부자는 망해도 3년은 간다지만 우리 집은 그렇지 못했다. 서울 남산 밑 후암동 500평 규모의 2층 양옥 대저택에서 살았던 우리 식구는 적선동 40평 한옥으로 옮겨가게 됐다. 하지만 여기서도 버틸 수 없을 정도로 경제사정은 악화됐고 다시 화동 2칸 방 전세로 내려앉았다. 이렇게 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1년도 되지 않았다.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식구들은 모두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렇게 큰 집에서 살다가 2칸 방에서 9명의 가족이 살자니 이만저만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누구보다도 아버지가 받은 충격이 컸다. 아버지는 매일매일을 술로 견디셨다. 아버지는 식구들을 보며 매우 힘들어했다. 모두가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하셨던 아버지는 스스로 목숨을 끊을 생각까지 했다. 목숨을 끊겠다는 생각으로 남산엘 자주 오르시는 아버지를 보는 식구들의 마음도 무너져 내렸다.
힘들기는 어머니와 형과 누나들도 마찬가지였다. 형과 누나들은 급작스런 생활환경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하기 시작했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날아가 버렸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풍비박산이라는 말은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가세가 기울면서 하루 끼니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경제적인 어려움이 가중됐다. 경제적인 어려움은 풍요로운 생활을 하던 식구들로서는 감당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금은 편안하게 말할 수 있지만 그 때 당시에는 그처럼 절박하고 어려운 일도 없었다.
하지만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또 있었다. 그렇게 자주 찾아오던 사람들의 발길이 뚝 끊어진 것이다. 단 하루도 손님이 찾아오지 않은 날이 없을 정도로 항상 시끌벅적하던 집안이 순식간에 적막강산이 되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끼니 걱정보다 더 감당하기 힘들었던 것은 이렇게 각박한 세상인심이었는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그렇게 허망할 수가 없었다. (계속)
2006-08-12 오전 11: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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