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흔히 새싹이 돋는 모습과 따사로운 햇빛에서 봄을 느낀다.
내 신행생활은 봄의 생명력처럼 왕성하지 않지만, 내 신행의 싹은 유년기의 추억 속에서 아지랑이 같이 피어오르는 듯하다.
나와 불교와의 인연은 내가 세상 구경을 하기 전부터였다.
집안 대대로 신행생활을 하던 곳이 범어사 말사인 경남 김해 장유암이다. 내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부터 다녔던 곳이다. 초등학교 다닐 때 방학이면 한 달씩 조그만 토굴이 있는 장유암(지금은 장유사가 되었지만)에서 지냈다.
불모산(佛母山)에 자리한 장유암(長遊庵)은 참 조용하면서도 역사가 묻어 있는 곳이다. 당시 집안 어르신이기도 한 백운 스님께서 주지로 계셨는데 동생과 나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시곤 했다. 그땐 옛날이야기가 마냥 재미있었는데, 좀 더 철이 들고 보니 그 재미있던 옛날이야기는 부처님 말씀과 선사들의 이야기, 사찰에 얽힌 이야기였다.
동생과 방학동안 장유암에 머물 때였다. 동생과 말다툼을 하다가 스님께 불려갔다. 스님께서 그때 이야기 한 구절을 해 주셨는데 아직도 잊혀 지지 않는다.
“김수로왕 왕후인 허 황후에게는 둘도 없이 사랑스러운 동생이 있었단다. 인도에서 가야까지 오면서 험난한 바닷길을 건너 남동생과 함께 왔는데, 누나가 가야 황후가 되어 궁으로 들어가자 동생은 누나가 너무 보고 싶어서 울었단다. 그러다 누나가 사는 가야왕궁이 보이는 이 곳 불모산에 살면서 누나의 행복을 위해 기도하고, 열심히 수행을 했단다. 화진이와 현주도 언제까지나 함께 오래 오래 살 것 같아도 얼마 지나 떨어져서 그리워하게 될지도 모르지….”
대웅전에서 스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왠지 모를 눈물이 났고, 혹시 동생과 헤어지면 얼마나 슬플까 생각하며 내가 마치 장유화상의 마음을 아는 냥 동생을 위해 기도했던 기억이 난다.
그곳에서의 추억은 나의 유년기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방학이면 몇 주씩 머물면서 새벽에 일어나 새벽 예불을 보고 참선하는 법도 배웠다. 그땐 그게 참선인지도 몰랐다. 아침마다 해가 뜨는 쪽으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30분정도 참선을 시키고 무슨 생각이 들었냐고 질문하시던 스님의 모습이 선하다.
그때는 눈꺼풀의 무거움에 짓눌려 잠들기도 했고, 부모님이 보고 싶다고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또 집에서 먹던 과자생각만 나기도 했다.
아침 먹기 전에 도량을 돌며 말하고 싶고 장난치고 싶은 마음을 잠재우게 했던 묵언수행의 가르침도 무엇인지 몰랐다. 그땐 왜 그리 말을 하고 싶고 장난을 치고 싶었던지….
백운 스님께서 버릇없던 나에게 해 주신 말씀이 지금의 내 직업을 예견하고 하셨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너는 할머니 귀여움 다 독차지 하고 커서 나중에 크면 어르신들 위해 많은 일을 해야 한다. 할머니 할아버지 마음 많이 어루만지고 살아야 해”라고. 어린마음에 “예”라고 대답은 잘 했다.
난 스물일곱에 청상이 되신 친할머니의 사랑과 귀여움을 많이 받고 커온 터라 버릇없고 천진난만한 아이였다. 유치원에 다닐 때, “할머니는 왜 신랑이 없어요? 부처님께 할아버지 보내달라고 절하는 거예요? 한 번만 할머니 신랑 봤으면 좋겠다.” 이렇게 할머니를 난처하게 했다. 그래서 아버진 할아버지 초상화를 할머니 방에 걸어주셨다.
난 매일같이 일어나 할아버지 사진을 보며 인사도 하고 가끔은 할머니 흉을 보기도 했다. “할아버지는 젊은데 할머니는 늙었어요?”라고. 사진속의 할아버지는 할머니와 결혼해서 몇 년 지나지 않았을 때 찍은 사진이었으니 삼십대 초반의 할아버지의 모습이었다.
할머니는 신행생활을 열심히 하시는 분으로, 저녁예불을 보시고 정진하시다 새벽예불을 마치고 집에 오시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새벽 예불을 마치고 오시는 할머니는 가족들이 깰까봐 살짝 내방 창문을 두드리시며,
“진아, 문 열어라. 잠 귀 밝은 우리 손녀 빨리 문 열어라.”
“누가 새벽에 오라고 했어. 나 잘 거야. 추운데 더 서 있어. 난 몰라” 라며 억지를 부리고 할머니를 새벽바람에 세워두던 못된 손녀였다. 그리고 절에 할머니를 따라가면 금방 엄마 보고 싶다며 집에 가자고 하고, 또 할머니가 절에 가신다면 또 따라 나서며 떼를 쓰는 좀 극성스러운 아이였다.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며 49재를 지내고 무덤 앞에서 우는 꿈을 꿨다. 꿈에서도 얼마나 울었던지 일어나니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할머니를 찾았다. “할머니 잘못 했어요. 다음부터 새벽에 문 잘 열어 드릴게요.”
이런 일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백운 스님의 권유로 부산 초량 소림사의 어린이법회에 나가게 되었다. 늘 할머니가 외우시던 <반야심경>을 듣고 자란 터라 어린이법회에 참가하는 누구보다도 빨리 반야심경을 외웠고, 수계를 받아 법명도 생겼다.
습성의 무서움인지 지금도 조금 불안하거나 너무 좋은 일이 있을 땐 반야심경을 중얼거리게 된다. 할머니와 부모님께서 생활 속에 심어주신 마음자리 찾는 좋은 씨앗인 것 같다. 마음이 힘들거나, 머리속 번뇌가 날 괴롭힐 때면 백팔 배 절을 하게 된 것도 그때 그 습관에서 오는 것 같다. 요즘 게을러져 절하는 수행을 자꾸 미루고 있지만 말이다.
20대 방황기엔 스님의 말씀을 따라 1080배를 100일간 하며 매일 <천수경>을 열 번씩, <반야심경>을 108번을 읽으며 나를 찾는 수행을 한 적도 있다. 100일 동안의 정진은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절에 사는 것도 아니고 매일 공부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시간을 만들어서 하는 이 수행을 하면서 난 많이 성장할 수 있었다. 몸은 힘들었지만 그래도 그때 해본 정진 수행이 나에게 남모를 힘이 되고 있는 것 같다.
결혼은 또 다른 수행의 길인 것 같다. 그리고 나의 새로운 면을 발견해 가는 신비함도 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육식을 하지 못하는 어려움을 안고 살아왔다. 마치 전생에 절에 살았는지 채식이 몸에 잘 맞고 육식을 하고 나면 탈이 나 거의 입에 대지 못한다. 그러나 남편은 육식을 좋아하고 시댁어른들도 고기 요리를 즐겨드신다.
어머니가 명절에 손님들을 위해 곰국을 준비하고 갈비찜을 준비할 때면 난 성질을 부리며 짜증을 많이 냈다. 난 먹지도 않는데 이 싫은 냄새를 맡아야 하고 찜통은 옮겨야 하냐며 성질을 부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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