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최우선순위로 ‘아침기도를 두라’는 스님의 말씀을 머리로는 잘 새겼지만, 게으름에 건성으로 실행했습니다. 어쨌든 꾸준히 기도는 놓치지 않으려 했고, 100일마다 있는 입제식에도 꼬박꼬박 참석해서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아 보기도 했습니다. 남편 역시 공부하던 절에서 진행하는 수련프로그램에 참가하거나 삼칠기도를 다녀오는 등 늘 밖으로만 향하던 눈을 자기 안으로 돌려보는 데 마음을 써 주어 고맙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남편이 마음을 내주면 오히려 쉽게 좋아 질 것이라는 기대를 해서였을까요. 변화는 훨씬 더디게 느껴졌습니다. 차라리 둘 다 불제자가 아닌 게 낫지, 이건 원 어디 가서 명함도 못 내밀 정도로 아는 것과 행하는 것 사이의 간격은 넓기만 했습니다.
작년 봄, 남편은 기도를 하고 싶다며 직장에 휴가를 내고 인연있는 절에 삼칠기도를 하러 올라갔습니다. 다들 머리 깎고 절로 가는 것 아니냐며 걱정을 했지만, 그 어떤 것보다도 마음공부가 중요한 것이라며 나는 남편의 결정에 흔쾌히 기뻐했습니다.
나는 남편은 초파일을 지나 회향을 해서 내려왔고, 다시 일상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전보다 더 자기 자신에게만 몰두한 채 생활하는 남편을 보며 또 화가 올라왔습니다. 기도하러 떠나는 남편을 너그러운 마음으로 바라보는 척 했지만, 내심으로는 문제 많은 남편이 변하면 내 생활이 한 단계 편해지리라는 또 한번의 기대를 했던 것입니다. ‘거저 얻어지는 건 정말 없구나, 상대방을 바꿔서 내가 편해지려는 어리석음을 부처님은 아셨구나’ 싶었습니다.
다니고 있는 절에는 온 가족이 불심으로 하나가 되어 부러움을 한 몸에 받고 있는 한 보살님이 있습니다. 지난해 있었던 일입니다. 일주일에 한번 북한동포를 위한 1000배 참회기도 정진을 하는데, 쉬는 토요일이라 거사님도 함께 나와 정진을 하시고는, 아침 공양 중에 나누는 한 이야기에 제 귀가 번쩍 뜨였습니다. 젊은 보살들이 남편과의 이러저러한 갈등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 밥상 앞에 계시던 그 보살님이 지나가듯 툭 말씀하셨습니다.
“싸우는 것도 다 기운 있어서 그래. 나이 들면 힘들어서 못해~. 상대에게 일일이 맞서는 게 얼마나 에너지를 써야 하는 일인데….”
아! 그랬구나. ‘내가 왜 이리 사는 것에 힘이 드는지’ 순간 알게 되었습니다. 세상일에, 사람들에게, 남편에게, 일일이 맞서며 내 의견과 주장을 표현하고, 또 그것이 관철되기를 바라고, 이루어지지 않으면 못마땅해 하니 어찌 힘이 안 들어가겠습니까. 내 고집 부리며 사는 게 나를 들볶고 있음을 모른 채, 그저 입으로만 ‘물 흐르듯 수순하며 사는 삶’을 바랐던 것이지요.
나는 요즘에서야 부처님의 말씀이 귀에 들립니다. 그렇게 여러 번 반복해서 들었던 <금강경>이며, 아침마다 읽었던 수행문이 이제야 눈에, 마음에 들어오고 있는 것이지요.
어느 스님은 “괴로워하는 것은 자기를 해치는 것이다. 남에게 의지하는 것도 미워하는 것도 이해하지 않는 것도 다 자기를 괴롭히는 일이다. 남이 나를 이해 해 주기를 바라기 보다는 내가 남을 이해하는 100일로 삼아보자. 그래서 괴로움이 없는 사람이 되어보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쉬운 얘기가 실천하기는 왜 그리 어려웠던지.
아마도 사실은 이랬을 겁니다. ‘남을 미워하는 게 나에게 이익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건 아니었는지’, ‘무조건 남을 이해하라는 것도 아니요, 무조건 나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라는 것도 아니요, 남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이 곧 나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이 쉬운 얘기를 그동안 모르고 살았던 것입니다.
여전히 나는 자주 넘어지고 걸리고 있습니다. 남편이 습관적으로 내뱉는 말과 행동에 나 역시 습관적으로 반응하고, 또 습관적으로 침묵의 싸움을 시작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삐치는 주기가 점점 짧아졌습니다. 한 보름씩 말도 않고, 눈도 마주치지 않고 지내던 게, 요즈음엔 간밤에 다투거나 혼자 마음이 상했다가도 다음 날 아침이면 또 상냥하게 말 걸 수 있는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제 34개월이 된 아이가 가끔, 아빠에게 틱틱 거립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별로 눈에 띄는 행동이 아니겠으나, 나는 뜨끔뜨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날이면 아이와 남편에게 잊지 않고 참회하려 합니다.
“미안합니다. 내가 어리석어 당신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당신, 참 답답했겠습니다.” 그러면서 그토록 밉고 원망스럽던 남편도 안쓰럽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제는 절망스럽지 않습니다. 비록 지난겨울의 추위가 아직 남아있어 땅위에서는 바람이 쌩쌩 불고 있어도, 땅 속에서는 이미 환한 봄을 틔울 싹들이 올라오고 있음을 알기에 괴로운 가운데서도 절망하지 않을 수 있어 기쁩니다.
남편은 요즘 첫사랑과 진하게 문자메시지도 주고받고, 또 자기와 말이 통하고 서로 이해할 수 있는 또 어떤 여인과 전화도 주고받는 모양입니다. 처음에는 조금 우습기도 하다가, 금세 화가 나기도 했지요. 그런데, 곰곰 돌이켜 보니 그럴 만도 하겠다 싶어집니다.
나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받아주는 사람, 잔소리 하지 않고 따뜻하게 격려하고 안아주는 사람이 얼마나 그리웠으면 그랬을까. 아내라고 있는 사람이 얼굴만 보면 잔소리 하고, 문제 지적하고, 바깥일 힘들게 하고 돌아와 월급 타다 주어도 당연하게만 생각하지 고마워하지도 않고. 그래서 그랬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웃음이 나기도 합니다.
‘와~, 내가 이렇게나 남편으로부터 자유로워졌던가. 죽네 사네, 이혼을 하네 마네까지는 아니더라도 닦달을 하고, 다짐을 받아도 시원찮아 했을 터인데 이 수준까지? 상대를 이해하면 내가 시원하고,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면 내가 답답하다는 이야기가 이런 것이었구나, 상대방 좋으라고 이해하고 사랑하라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 괴롭지 말라고 얘기해 주신 거였구나. 나는 그렇게 철저히 이기적이지 못해서 그동안 헤맸던 거구나’ 싶어집니다.
불법은 철저히 자기를 향해야지, 타인을 향해 겨눌 때 무기가 된다는 말씀, 내가 ‘업식’이라는 색안경을 끼고 사물을, 사람을, 세상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인정하기만 해도 인관관계가 훨씬 수월하고 자유로워진다는 스님의 말씀이 참으로 와 닿았습니다.
지금까지 나는 불법을 만나, 얼마나 자주, 여러 사람에게, 세상일에 무기삼아 들이댔던지. 이게 옳다고, 이렇게 하는 게 맞다고, 이렇게 해야 모든 사람이 다 행복하다는 ‘자리이타(自利利他)’를 내 맘대로 적용하면서 말입니다.
나의 습관과 행과 마음을 살피기보다는, 바깥을 재단하고 고치는 도구로 썼던 부처님의 법을, 이제는 나에게로 자꾸 향해 봅니다. 그러면서도, 부처님의 법을 또 하나의 ‘콘택트 렌즈’로 쓰고 있지는 않은지 매순간 살펴보려 합니다. 렌즈의 부드러운 착용감 때문에, ‘내가 또 색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고 있구나’ 하는 걸 모르는 건 아닌지 말입니다.
불법이 또 하나의 기준이 되고, 잣대가 되어 나에게, 가족에게, 세상에게 ‘들이대지’ 않도록 잘 살피며 살아가겠습니다.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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