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70. 4.25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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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내지 않겠습니다 (중)/박현이 (대전시 대덕구 법1동)
둘이서 한적하게 집 뒷산에라도 산책할까 싶어 제안을 하면 “너랑 둘이 무슨 재미로? 싫어”하는 대답이 돌아오기 일쑤였고, 그럴 때면 마음에 알 수 없는 찬바람이 가득 차곤 했습니다. 우리 집은 부부사이의 다정한 대화나 공동 활동이라고는 없이, 그저 남편의 ‘하숙집’같았습니다.
나 역시 ‘그래, 절 생활도 해 보았는데 뭐 어떠랴, 머리 기르고 속복 입고 산다 뿐이지, 그냥 출가했다는 생각으로 지내자’ 며 애써 기대감을 억눌러 보기도 했습니다.
남편과 상의나 협조가 되지 않으니, 부부가 상의해서 할 여러 일에 점점 양쪽 어른들의 손길이 미쳤고, 남편은 오히려 그 면을 편해 하는 것도 같았습니다. 점점 남편의 일거수 일투족에 신경이 곤두섰고, 어른이 일일이 뒷정리를 해 주어야 하는 아이 같은 남편에게 깊은 절망감이 들었습니다.
나는 남편에게 머리로만 불교를 이해했지 도무지 생활 속에서 행이 따르지 않는다는 근본적인 지적을 해대며 불평을 드러냈어요. 그러면 그럴수록 남편은 남편대로, 시간이 흐를수록 나에게서 ‘문제점’만 지적받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 싫다며 노골적으로 “간섭하지 말라”고 말하기 시작했죠.
그러면서 남편은 점점 컴퓨터 게임 중독자가 되어갔습니다. 나는 저녁 퇴근 무렵이 되면 우울함이 밀려오며 집에 들어가기가 싫어졌습니다. 집에 가 봐야 건너 방에서 밤새워 컴퓨터 게임을 하는 남편과 있으면 설움이 복받쳐 울기 일쑤였던 것입니다.
화목한 집안에서, 부모님의 다툼이나 갈등하는 모습을 보지 않고, 대가족 안에서 막내로 사랑받으며 자란 나에게는 죽음과도 같은 시절이었습니다. “적어도, 가족이라면, 부부라면, 사회 운동하는 사람이라면, 환경문제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불자라면, 이 정도는 해야지”하는 기준을 끊임없이 들이대며 남편이 변해주기만을 바랬습니다. 그럴 때마다 남편은 “기준이 다르다, 왜 싫다는 걸 억지로 시키느냐”며 조금도 받아들여주지 않았습니다.
학생시절에 그토록 힘들어하면서 사회를 온통 ‘문제투성이’로 보며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로 고민하던 나는 이제 남편에게 그 모든 화살을 돌리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1년여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도무지 나의 사량 분별로는 남편과 맞추고 살 엄두가 나지 않아 부산의 한 절에서 수행에 도움이 될 지침의 말씀과 기도문을 받을 기회를 만들어 여러 도반들과 남편과 함께 가게 되었습니다. ‘무조건 선지식이 하라는 대로 하리라, 그것이 지금의 내 괴로움을 뛰어넘는 길이리라’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그때 들은 첫 마디가 “이혼하지 마세요, 요새 사람들 이혼 잘 하데요~”하는 것이었습니다. 내 마음을 송두리째 알아챈 첫 말씀을 듣고부터 터진 눈물은 얘기를 듣는 내내 그치지 않았습니다.
뭔지는 몰랐지만, 그저 이렇게 살아온 ‘나’라는 모양과 ‘나’라고 믿는 그 속에서 내는 생각으로는 지금 닥친 이 어려움을 헤쳐 나갈 수 없겠다 싶었습니다. 또 ‘나’를 믿지 않는 그 마음으로, ‘시키는 대로 하겠다’하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부처님, 관세음 보살님, 남편에게 성질 내지 않겠습니다. 이 세상에 내 남편 한 분 뿐입니다. 당신이 이렇게 소중합니다. 깊이 참회합니다.”
그때 받았던 이 기도문을 지금까지 거의 단 하루도 잊지 않고 마음에 새기며 생활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거 놓치면 죽는다’하는 심정이 들 때도 많지만, ‘대체 어떻게, 얼마만큼 해야 남편에게 성질내지 않는 수준인걸까’ 마음이 답답하고 조바심도 났죠.
막연히 3년 기도를 하고 나면 나도 남편도 변해 있을 것이라는 더 큰 기대를 한 채 생활은 이어져 갔지요. 그러나 수행의 관점을 명확히 하지 않은 채 시간만 흐른다고 저절로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들은 것도 아는 것도 많은데, 남편과 부딪힐 때 ‘내가 또 옳다는 고집을 내 세우고 있구나. 잠시 또 정신이 헷갈려서 정말 내 생각이 맞다고 철썩 같이 믿고 있구나’하고 한 생각 돌이키는 건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한 1년여쯤 살아보니, ‘우리 두 부부사이에는 차라리 아이가 없는 게 낫겠구나, 그냥 공적인 활동에서 보람과 가치를 삼아 살아야지, 사생활이 있으면 오히려 여러 갈등이 있겠다’ 싶어 거의 그렇게 맘이 기울었을 즈음, 아이가 생기게 됐죠. 계획에 없던 일이긴 했지만, 출산을 하면 직장을 그만두고 육아를 최우선에 두기로 마음먹었어요.
이후, 불교대학에 등록해서 일주일에 한번씩 법당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매일 태교법문이나 금강경 테이프를 들으며 절대 남편 미워하고 원망하는 마음 내지 않으려 했습니다. 아이가 태중에 있을 때, 여자가 남편을 미워하면 나중에 아이와 아빠사이에 갈등의 씨앗을 심는 것이라는 말이 조금 무섭기까지 했습니다. 지금은 비록 내 업식 때문에 남편과 갈등이 있지만, ‘이 갈등의 씨앗을 아이에게는 물려주지 않으리라’ 굳은 마음을 내 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스님 말씀대로, “애쓰고, 노력하고, 각오한다”고 될 일이 아니었습니다. 남편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니, 이미 미워하는 마음이 일어났는데 거기다 대고 미워하지 않으려 마음 다스리려 애써봐야 소용없는 짓이었습니다.
태중 아이가 5개월쯤 되었을 때, 기도를 입제한 도반들과 스님의 상담 기회가 있었습니다. 하필이면 그날 새벽녘 꿈이 남편에게 이혼하자는 말을 한 날이었죠. 그래서 그 이야기를 가볍게 꺼내었더니, 스님께서 아주 매서운 말투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기 지금 몇 개월 됐어요?”
“예, 5개월이요.”
“그럼, 지워 버리세요! 그런 생각 할 거면 뭣 하러 낳아요. 내가 화나서 어쩔 줄 몰라 하면 뱃속의 아기는 갈 데가 없어요!”
아차, 싶었습니다. 뱃속 열 달이, 나서 10년보다 더 중요한 때라는데, 나 하나 어리석어 헤매고 방황하는 건 내 몫이라지만, 못난 어미 만나 그 좁은 뱃속에서 아기는 대체 무슨 고생인가 싶어지면서 말입니다. 이렇게 흐리멍텅하게 수행해서는 안 되겠다 싶어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그렇게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남편에 대한 기대감을 ‘내려놓자 내려놓자’ 하였지만, 역시 잘 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밖으로만 돌고, 일주일에 4~5일은 술에 취해 한달에 서너 번도 넘게 외박을 하는 남편에게 “아이의 아빠”라는 자격을 박탈시키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 고개를 내밀었습니다.
남편과의 갈등은 집안 갈등으로까지 이어졌습니다. 아이가 태어난 지 백일 즈음부터 3개월 여 동안 남편은 시댁에서, 나는 아이와 함께 친정에서 생활하는 별거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생활이 끝날 무렵, 기도문을 떠 올리며 다시 마음을 내 보았습니다. “이 세상에 내 남편 한 분 뿐입니다”라는.
그리고 이사를 했는데 우리 생활에도 아주 조금씩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계속)
2006-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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