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70. 4.25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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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내지 않겠습니다 (상)/박현이 (대전시 대덕구 법1동)
내가 불교를 만난 건 대학교 4학년 무렵이었습니다. 하고 있는 공부가 주로 사회구조와 갈등,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론에 관한 것이어서 나는 마치 세상의 모든 고민을 ‘내가 다 해결이라도 해야 하는 듯’ 매일 머릿속이 자글거렸습니다. 농촌문제, 노동문제, 여성문제, 환경문제…. 내 온 몸과 마음을 감싸고 있는 화두는 오로지 ‘문제, 문제, 문제’ 투성이였던 것입니다.
그 즈음 나는 참 많이 아팠습니다. 특별히 큰 병이 있는 게 아닌데도 목뒤가 뻐근하고 어깨와 등까지 통증이 이어졌습니다. 파스로 온통 도배를 하고 학교를 다니기도 했고, 아무리 한의원을 다녀도 낫질 않았습니다. 여러 군데를 다니던 중, 한군데에서 전해 준 한의사의 말은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무덤까지 가지고 갈 병이라고.” 참 절망적인 이야기였지요.
뚜렷한 병의 원인과 병명도 모른 채 막연히 ‘간(肝)’이 좋지 않아서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별다른 차도도 없이 한의원에만 의존할 수 없어 주위의 권유로 단전호흡을 시작해 보기로 했습니다.
등록을 위해 갔던 첫 날, 몸의 기 상태를 점검하시던 사범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왜 이렇게 본인의 몸이 아픈 것 같으냐”고 묻기에, 나는 “엄마가 장사를 하셔서 간혹 집을 비우시는데, 그럴 때면 새벽에 일찍 출근하시는 아버지 아침상을 차려 드리려고 일어나야 해요. 그런 상황이 되면 굉장히 힘들고 긴장 됐어요. 이후 생활할 때도 비슷한 경우가 많습니다”는 내용의 답변을 했습니다.
그때, 그 분은 나를 가만히 보며 하는 얘기가 “기왕에 할 거면 편하게 하면 좋지 않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처럼 쉽고 간명한 답이 어디 있을까 싶지만, 그때의 나로서는 그 말이 아주 충격적인 이야기였습니다. 매사에 불만이 많고, 열심히는 하지만 뭘 해도 문제점 위주로 지적하기 좋아하던 나는, 사실 단 한번도 “기왕에 할 것 기분 좋게 하자”는 쪽으로 마음을 내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단전호흡 수련을 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온통 “우리 사회의 구조문제와 그것을 해결할 실천 주체로서의 개인”에 몰두해 있던 것에서 “몸과 마음이 건강하고 평화로운 개인”이라는 쪽으로 무게중심이 이동하게 된 소중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수련은 여러 가지 이유로 그렇게 길게 이어지지는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무렵 군복무를 하고 있던 한 선배와 부처님의 법에 관한 얘기를 편지로 주고받기 시작했습니다. 선배가 휴가를 나와 만나게 되면 열에 들떠 불교를 이야기하는 그 사람에게 맘이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졸업을 앞둔 가을, 환경문제를 부처님의 연기법의 관점에서 풀어나가고 있는 한 불교사회단체 산하의 환경 NGO를 내 인생의 첫 직장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내게 있어 불교는 너무나 완벽했습니다. 부처님의 법대로 자신 내면의 문제, 개인과 개인의 갈등, 사회의 여러 문제, 민족 갈등 등을 풀어나가면 조금도 어려울 것 같지 않았습니다.
집안의 분위기도 종교와 아주 무관하고, 특히 그 단체의 다른 대중들처럼 불교대학생 활동을 했던 것도 아니어서 아주 생소했습니다. 하지만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그렇게 절 생활에 적응해 나갔습니다.
그렇게 좋아하던 것도 잠시, 나는 일과 공동체 생활을 함께 하는 것에 점점 힘이 들었습니다. 지금은 어느 절에서 출가를 했다는 소식을 후에 듣게 된 한 법우는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해 주더군요. “일을 잘 하려는 것에 초점을 두기 보다는 사람들에게 맞추는 걸 해 봐야 할 것 같다”구요. 이 말은 지금도 부처님의 그 어떤 이야기보다 더 자주 떠오르는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첫 인연이 되었던 단체에는 그리 오래 몸담지 못했습니다. 계속 이어서 비슷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태어나 책 한권 읽은 사람이 제일 무섭다는 말처럼, 이제는 부처님의 법에 근거한 방법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일하는 사람이나 조직을 보면 답답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법’이 무기가 되어 나 자신을 겨누고, 못살게 굴고, 함께 일하는 이들을 공격하는 무기가 되고. 부처님 법을 모르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답답하게 여기는 씨앗을 심기 시작한 것이지요.
자라온 집안 환경과 여러 조건의 영향으로 ‘바르고 옳은 것’을 좋아하던 나에게 불교는 오히려 병통이 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무렵, 군대에서 편지를 주고받으며 불법을 만난 ‘신기함과 우월함’을 나눴던 그 선배와 부부의 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세상일에, 사람들에게 거는 최고의 기대와 확신을 ‘남편’이라는 한 사람에게 총 집중하며 말입니다.
이제,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단체로 향하던 분별심이 ‘남편’이라는 새로운 대상에게로 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도 부처님의 법을 등불 삼아 인생의 중심을 잡으면서 도반이라는 이름으로, 수행이라는 이름으로 어느 부부보다도 멋있고 아름답게 살 수 있으리라는 꽉 찬 기대 속에서 말입니다.
아주 많은 부부들이 그러하듯, 나에게도 결혼 3년여 동안은 ‘이혼과 마음 돌이키기’를 반복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렇게 좋아보이던 장점이 단점으로 보이기 시작할 무렵, 서로 다른 절과 스승에게 공부한 것이 도리어 화근이 되어 다투기 일쑤였습니다. 그것이 아상에서, 법상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 채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팽팽히 맞서며 싸웠지요.
농촌이 고향인 나는, 늘 농사일로 바쁜 어른들 밑에서 크느라 아이들이 대부분의 생활을 스스로 챙기는 분위기 속에서 자랐고, 남편은 도시에서 전업주부인 엄마로부터 모든 보살핌을 받으며 자란지라, 동등한 가사노동 참여는 고사하고 코 푼 휴지조차도 휴지통이 조금만 멀면 그냥 책상위에 두기 일쑤였습니다.
옷걸이에 옷이 가지런히 걸려있는 날도 없었고, 둘 다 사회활동을 하느라 바빠 적어도 일주일에 한두 번 방이라도 닦으며 협조를 구하면, ‘청결의 개념이 다르다’며 자기 볼일만 보았습니다. 어쩌다 남편 혼자 집에 있고 밖에서 내가 급한 일로 전화를 해도 귀찮거나 자느라 안 받기 일쑤였고, 먼저 나가는 날에 밥과 국을 챙겨 놓았다가 퇴근해서 보면, 밥통문은 열린 채 밥은 다 말라 비틀어 있고, 국 냄비는 냉장고에 두지 않아 음식이 쉬어있기 일쑤였습니다.
결혼 첫 해 겨울 어느 날에는, 보일러가 고장 나서 한 삼일을 냉방에서 자는데도, 낮에 시간을 쓸 수 있던 남편이 A/S를 하지 않아, 내가 밤마다 일어나 임시방편으로 보일러를 손 보다, 급기야는 시아버님께 부탁을 드려 수리한 적도 있었습니다.(계속)
2006-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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