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떠난 사람에게는 도리도 아니었고 미안하고 죄스러운 마음이 가득했지만, 아내가 세상을 뜬지 1년도 못되어 나는 재혼을 결심했다. 직장 동료이면서 내가 힘들어 하는 과정을 지켜봤던 한 사람이 내게 자비심을 냈다.
예식은 원찰인 불광사 대웅전에서 치렀다. 주례는 광덕 큰스님께서 서 주시기로 했으나, 건강이 급격하게 나빠지셔서 대신 한탑 스님께서 맡아 주셨다. 처녀의 몸으로 아이 셋 딸린 홀아비에게 마음을 낸 지금의 아내는 나와 아이들에겐 또 다른 관세음보살이다. 아울러 못난 나를 한번 만나보시고 너그럽게 허락해주신 장인, 장모님께는 항상 죄스럽고 감사드리는 마음뿐이다.
결혼 후 지금의 아내는 아이들을 너무 잘 키웠고 나빴던 나의 건강도 좋아졌다. 그래서 부모님과 주변으로부터 칭찬과 사랑을 많이 받았다. 흔히들 불법 인연 만나기 어렵고 훌륭한 스승 만나기는 더욱 어렵다고들 하나, 나는 내 인생의 대불행을 반연하여 대행복을 만난 복 받은 자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두 가지를 모두 구족했으니.
결혼식을 마치고 신혼여행을 떠나기 전 광덕 큰스님을 찾아간 자리에서 들은 말씀이 아직도 생생하다.
“보살의 마음이 정말 갸륵하다. 세상의 여러 가지 공덕 중에서 남의 자식을 길러주는 공덕만한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하셨다. 어느 날 법회를 마치고 몇몇 도반들과 함께 큰스님을 찾아뵌 자리에서 내가 여쭈었다. 마하반야바라밀의 참뜻을 좀더 쉽게 말씀해주십사 하고. 그랬더니 스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라고 하셨다. 정말 그러했다.
나는 더욱더 불교공부에 박차를 가했다. 매주 일요법회시 법좌에서 ‘반야바라밀’의 사자후를 터트리시는 광덕 큰스님의 가르침은 백척간두에서 허덕이던 내게는 감로수요, 묘약이었다. 인생의 아이러니라고나 할까, 먼저 간 아내의 죽음으로 다시 이어진 불교와의 인연을 두고 고맙다고 해야 할지, 새삼 묘한 인연법을 느끼게 된다.
불교 공부를 열심히 하면서 사찰에서의 활동도 자연히 많아지게 됐다. 나는 불광사ㆍ불광법회에 나가면서 거사들로만 구성된 대원법등에 입회했다. 아내의 죽음으로 영혼에 비상이 걸린 나는 빠짐없는 법회참석과 조석일과 및 기도수행은 물론, 누군가 상을 당하면 법우들과 곧바로 상가(喪家)로 달려갔다. 영가축원기도 및 상례작법을 전담해서 봉사하는 연화부 활동에 매진했다. 그 영향인지 얼마 가지 않아서 선배 형님들의 강력한 추천으로 법등조직을 책임지는 간부로 위촉됐다. 그 후 오랫동안 법등 여러 도반들과 신행생활은 물론 사중의 대소사를 함께 했다.
1989년으로 기억되는 어느 날이었다. 사중에서 법회의 사회를 맡았으면 좋겠다는 말씀이 있어 몇 번의 고사 끝에 일을 맡게 됐다. 능력은 부족했지만 그 인연으로 오늘날까지 각종 법회나 중요 행사 때마다 대중 앞에 서고 있다.
사찰에서의 활동을 언급함에 있어 광덕 큰스님을 빼놓을 수가 없다. 불광사ㆍ불광법회의 창건주이신 광덕 큰스님께서는 한국불교 도심포교의 선구자로서 여러 방식의 포교활동을 눈부시게 전개하신 분이다.
1992년 초여름, 세계 불교음악 역사상 유례가 없는 대광명의 합창이 온 누리를 밝히는 일대 인연사이자 대작불사가 벌어진 날의 감격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600명이 넘는 선남자 선여인들의 코러스가 무대에 섰고 그 앞에 솔리스트 3인(거사ㆍ보살ㆍ스님)과 소리중창단, 무용단, 국악관현악단이 함께 연출해 낸 것이다. 화엄경의 정요인 ‘보현행원품’을 광덕 큰스님께서 작시하시고, 한국음악의 거장 박범훈(현 중앙대 총장)님이 작곡ㆍ지휘한 국악교성곡 ‘보현행원송’이 세종문화회관 대공연장에서 성황리에 펼쳐졌던 그 날의 그 감격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뛴다. 그날 이후 여러모로 부족한 내가 교계의 공연요청에 남자 솔리스트로 지명되어 여러 공연 무대에 서게 되는 ‘영광의 인연’을 맺게 됐다.
법명 이야기도 내 신행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다. 86년 9월경 내가 재직하던 직장의 여직원 모임에서 자선 일일찻집을 운영했다. 나는 거기서 얻어진 수익금과 회사에서 결재해준 의료약품 및 보시금을 가지고 양로원에 위문방문을 가게 됐다. 송파구 오금동에 있는 청암양로원이었다. 100여 분의 노인들에게 회사를 대신해서 위문드리면서 다시 한번 생의 무상함을 뼈저리게 느꼈고, 병들어 계신 노인들에 대한 측은지심으로 돌아온 그날 밤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렇게 한 주일을 보냈고, 그 다음주에 우리 거사법등에서 야외 순례법회를 북한산 흥국사로 가게 됐다. 하루 종일 기도를 하는 동안 며칠 전 뵙고 온 청암양로원 노인들의 건강수복을 발원하며 일념으로 기도했다. 그러고 난 뒤 다음달 초에 있은 불광계단 수계식에 동참해 의식을 치른 뒤 계첩장을 받아 들고 정말 깜짝 놀랐다. 계첩장에는 분명 법명이 ‘청암’이라고 적혀 있었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묘한 인연이라고 생각된다.
나는 오늘도 스님께서 일러주신 가르침, “우리 불자들 모두가 성불을 외칩니다만, 우리는 이미 오래 전에 성불했던 완전자입니다. 부처를 다시 이루는 것이 아니라 참나를 찾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보현행원으로 보리를 다시 이룰 따름이다”라는 가르침을 다시 한번 가슴에 아로새긴다.
무명으로 덮였던 나를 확연히 바꾸어 준 것은 반야(지혜)의 개안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육바라밀, 팔정도의 구현도 반야사상을 바탕경계로 하되 나아가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어떤 대상을 접할 때 내 것이냐 네 것이냐의 소유적 경쟁개념에서, 너와 내가 공존한다는 존재적 동일개념으로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부처님께서 중생들에게 간곡하게 당부하신 것, 즉 이것과 저것 그리고 너와 내가 직물의 씨실과 날실처럼 짜여진 인연으로 얽혀 있다는 연기법을 깨닫게 됐다. 자기 안에 이미 부처가 있음을 깨달아 아는 것 또한 반야바라밀의 개안이라고 할 수 있겠다.
중생의 생명이 곧 부처님의 무량한 공덕생명임을 깨닫게 해 주신, 높게는 제불보살님 가깝게는 광덕 큰스님의 가르침에 돈수백배 합장예경 드리옵니다. 나무 마하반야바라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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