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자 화두 왜 내게 왔을까? 탑 쌓으면 풀릴 것 같은데…
‘무(無)…’
없을 무(無), 허무(虛無)의 도로 떠오르는 ‘무’라는 화두가 어느 순간 내게로 왔다. 이때까지는 화두를 구할 엄두는 물론, 접할 기회마저 주어지지 않았는데….
근기가 수승한 스님네 들만 접하는 이 ‘무’자 화두가 왜, 내게로 온 것일까. 갑작스레 다가온 화두는 마치 벼르고 벼른 끝에 나를 찾아온 것 마냥, 잠시도 내 곁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밥을 먹을 때나, 속을 비울 때는 물론이고 눕거나 앉아 있거나 서 있을 때나 매한가지였다.
실은, 이전까지 나는 나무를 다루고 있었다. 아무리 거칠고 볼품 없는 나무라 할지라도 내 손을 거치고 나면 찻잔이 되고, 도자기가 되고, 웅장한 탑이 되기도 하였다. 마음속에 떠오르는 형상을 그대로 재현해 내는 과정이 나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구도의 한 방편인 셈이었다.
이 와중에 잡힌 ‘무’라는 화두는 나무를 다루는 일로 인한 그 어떤 감흥도 허용하지 않았다. 심지어 이전까지 그토록 열정과 보람을 느끼던 나무와 관련된 모든 일이 그토록 허망하고 쓸모 없게 다가올 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이 날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방 한가운데에 반가부좌를 하고 앉아 이 ‘무’자 화두와 끝이 보이지 않는 담판을 이어가고 있었다. 한 편으론 달래보기도 하고, 얼러 보기도 하면서 어떻게든 혼란한 마음을 다스려 보았지만 가슴은 더욱 답답해지고 있었다. 그에 편승이라도 하듯, 하단에서 시작된 기운은 상기가 되어 머릿속을 온통 실지렁이 같은 복잡 미묘한 감정만 꼬아놓을 뿐이었다.
‘주체할 수 없는 미혹을 감당하지 못하는…. 지금의 이 마음은 과연, 누구의 것이란 말인가. 무… 무…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던 나는 묵묵히 나를 지켜보고 있는 듯한 어떤 파장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창문 가에 놓아 둔, 나무로 만든 ‘탑’이었다.
이전까지는 그저 몇 번의 내 손놀림 끝에, 다듬어진 조각 정도로만 느껴지던 탑이 살아있는 생물체보다도 더 신비로운 감동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무’ 한 자로 떠오르는 화두와 탑에서 전해오는 파장의 경이로움이 하나로 이어지는 순간, 백회 부위의 경혈이 ‘뻥’ 뚫리는 느낌에 나는 적잖이 고무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화두에 대한 궁극의 실마리를 풀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 방편으로 괜히 탑을 한 번 쌓아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토록 간절히 원하던 답을 얻었으니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눈에 띄는 대로 탑을 쌓을 만한 재료들을 모아, 아무 생각 없이 한 층, 한 층 쌓아 올린 단층의 탑이, 어느새 내 키를 훌쩍 넘어 천장까지 닿을 정도가 되었다. 순간, 내 몸의 어느 한 곳에서 시작된 전율이 내 몸과 영혼을 하나로 이어주는 대 환희심을 일으키고 있었다.
‘아, 바로….’
이제는 ‘탑’이라는 유형의 실체가 화두이자 실상의 도(道)로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나무를 깎고 다듬는 과정에서 ‘나’라는 존재를 잊을 수 있었지만 그 경계 넘어, 어딘지 모르게 부족한 무엇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웬지 모를 허전함이 늘 잔상으로 남아 뇌리를 떠나지 않았던 터라 탑으로 인해 다가온 위와 같은 감동은 불 보살님이 내게 주신 대자대비의 공덕과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현실이 아닌 꿈에서 다시 한번 확인 할 수 있었다.
탑을 쌓고 있었다. 주변에 널린 이름 없는, 인연 없는 돌들, 그 모두가 오직 나만을 기다리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중에는 몇 천년이 된 돌도 있었고 몇 십 년이 된 돌도 있었다. 허나, 그 돌들 모두엔 하나같이 깊이를 알 수 없는 한(恨)이 전해져 왔다. 그런 돌에 내 손이 닿자, 돌은 영혼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돌의 영혼은 그 답례로 나를 들어 올렸지만 나는 따라 올라 갈 수 없었다. 나에게는 피를 나눈 혈육이, 정을 나눈 이웃이, 한민족이라는 인간의 영혼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상에 남겨진 나는 영혼이 빠져나간 뒤의 빈 껍데기 같은 돌을 안아 들었다. 돌과 내가 둘이 아니라는 사실이 이토록 가슴 벅찬 희열로 다가올 줄은 생각지도 못하는 일이었다. 순간, 하늘에선 꽃비가 내리고 형언할 수 없는 천상의 음악이 허공을 울리기 시작했다. 그 사이로 다시는 내려오지 않을 것 같던 돌의 영혼이 눈이 부실정도의 금빛 후광을 띤, 불보살이 되어 지상으로 내려와 한 층, 한 층 탑이 되고 있었다. 그 원대한 공덕으로 인해 살아있는 생명체는 물론, 구천을 떠도는 길 잃은 영혼들이 일순간에 법열에 드는 최상의 공덕을 이루는 것이 아닌가. 주체할 수 없는 가슴 벅찬 희열로 인해 나는 꿈에서 깨어날 수밖에 없었다.
이 후, 나의 몸과 영혼은 온통 탑을 쌓아야 한다는 생각밖에 일어나지 않았다. 육신을 가지고 있으면서 불 보살의 경계를 경험 할 수 있었다는 사실보다 더 큰 공덕이 있을까. 하지만 나의 근기는 그 이상 더 나아갈 수 없었다. 탑을 쌓아야 한다는 일념만 있을 뿐, 언제부터 어느 곳에 어떻게 쌓을 수 있을까 막막할 뿐이었다. 피가 마르고 영혼이 피폐해지는 과정이 이어졌다. 꿈에서 본 한 많은 영혼들이 특히 이 나라, 이 겨레를 지켜온 호국영령들의 피끓는 애국심이 내 가슴을 태우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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