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모르고 처음으로 108배라는 걸 하던 시절의 이야기다.
불상이 있는 곳은 다 절인 줄 알았던 시절이었다. 정법이 따로 있다는 것, 사이비 법당이 무수하다는 것을 전혀 모르던 시절, 친구를 따라서 세검정 산꼭대기에 제법 번듯한 암자를 가게 됐다. 대통령 부인도 다닌다는 유명한 절이었다.
암자에 들어서면서부터 나는 바싹 긴장했다. 스무 평 남짓한 방 정면에 그 벽면을 가득 채운 백의관세음보살상을 배경으로, 한 여인이 연분홍 한복차림으로 겹겹이 쌓아 올린 높은 보료 위에 앉아서 상담을 하고 있었다. 마치 벽면의 보살이 내려앉은 듯 상호가 좋았고 약간 비만한 몸 매무새가 분위기를 압도했다.
오후 두시로 예약하고 갔는데도 기다리는 사람이 스무 명 남짓했다. 비밀도 없이 모든 사람이 함께 듣고 있었다.
“응, 아우 왔구먼, 기다려.”
그 여인이 친구를 건너다 보며 아는 체를 했다.
경상도 사투리가 약간 섞여 있는 여인의 음성은 맑고 부드러웠으나 위엄이 있었다. 기다리는 동안 나는 내 삼주(그녀는 시를 보지 않고 년 월 일 三柱만 봤다)를 적어 냈다.
친구는 수년 째 단골이라고 했다. 남편과 같이 왔었는데, 들어서자마자 대뜸 한다는 소리가,
“승진 때문에 온 모양인데, 병원부터 가요. 지금 건강이 문제지, 승진은 나중 문제야, 몸이 좋아지면 다 저절로 좋아져… 병원 들렀다가 나중에 와요.”
삼주도 내밀지 못하고 쫓겨나다시피 했다고 했다.
“얼마나 황당했겠어, 멀쩡한 남편은 마누라 때문에 망신당했다며 난리지… 하지만 병원에 가보란 소리가 걸려서 병원엘 갔지 뭐.” 종합검사 결과 친구의 남편은 췌장을 들어내는 수술을 했고 완쾌 후 승진을 했다며, 그 이후 계속 대소사를 상담하며 산다고 했다.
차례가 됐다. 그 여자는 나를 힐끗 건너다보더니 친구와 수인사를 끝내고 삼주를 풀기도 전에 툭하고 한마디를 던졌다.
“왜 직장 바꿔 보려고? 지금 있는 병원도 괜찮은데….”
숨이 멈출 것 같았다. 직장에 관한 일을 물으려 간 것도 아니고, 내가 병원에 근무하고 있는 일은 친구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친척 한 분이 산부인과를 하고 있었는데, 나는 그곳 상담실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전공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데다가, 낙태수술의 전문병원으로 알려진 곳으로 평판이 좋지 않아서 숨기고 있었다. 마침 여고 교사 자리가 생겨서 옮길까 말까 망설이고 있었는데 그것을 집어냈다.
“수입이야 병원이 좋겠지만, 선생님이 아이들을 위해서는 훨씬 좋지. 선생님은 가문이기도 하거든. 돌아 갈 때 법당에 가서 108배나 좀 하고 가요. 병원에서 좋은 상담만 한 거 아니잖아요?”
좋은 상담만 한 거 아니지 않느냐는 말에 나는 법당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상담의 반 이상이 낙태수술을 해야 하는 경우였고, 의사의 책임이 문제될 때를 대비한 형식적인 만류가 내 몫이었고 그 기록을 남기는 일이었다. 늘 그 일에 회를 느끼고 있던 터여서 겁도 없이 108배에 도전했다. 그때의 상황으로는 절을 하지 않으면 어떤 불이익이 있을 것 같았다.
좋은 상담만 한거 아니지 않느냐는 말에 양심이 찔리기도 했다. 법당에서 3배 이상 해본 적도 없으면서 까짓거 못하랴 싶었다. 108배는 생각 보다 힘들었다. 친구의 부축을 받고 겨우 계단을 내려왔다.
‘정말 이상해, 어떻게 병원에 있는 줄 알지? 크레졸 냄새가 몸에 배었는지도 몰라. 하지만 직장 문제로 고민하는 걸 어떻게 알지…’
그 날의 놀라움이, 다리가 아파서 3일이나 끙끙 앓은 참회의 108배가 나를 여고 선생님으로 탈바꿈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 날의 108배가 10여 년 간 절 수련을 하는 계기가 됐고, 그 삼주 보살과 개인적 친분을 맺게 됐다.
나는 심심하면 삼주 보살을 찾았다. 가기만 하면 그녀는 108배를 시켰다.
“너는 기도를 많이 해야 된다. 그래야 자식들이나 남편이 잘되고 너도 건강해진다. 7일을 매일 108배씩 해 봐. 좋은 일 있을 테니….”
나의 불법 인연은 이렇게 정법이 아닌 곳으로부터 시작됐지만, 점차 미혹을 벗고 밝은 지혜를 향하는 인과의 씨앗을 심은 셈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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